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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3



영국 동성애자들의 삶은 1967년 이후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 세대는 지금도 여전히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67년 가결된 성추행법(Sexual Offences Act)는 하나의 전환점이었지만, 그 영향은 복합적이고 느린 것이었다. 사이먼 캘로우, 모린 더피 등의 인사들이 동성애 비범죄화를 전후로 한 삶을 회상한다.



동성애자 해방전선 시위. 1972년 런던. 사진: Clive Dixon/REX/Shutterstock



1967 6 14 11 30. BBC2에선 Late Nigh Line-Up 시작되고 있었다. 색서폰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진지한 표정의 토론 참가자들의 얼굴을 비췄다. 패널은 의사, 사회심리학자, 보수당 의원과 작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가장 뜨거웠던 주제 , 동성애에 대해 토론하며 당일 저녁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자리였다. 사회자 마이클 딘의 말을 빌자면 “ 어떠한 비판이나 의견 없이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처한 상황을 직접 말하는 방송이었다. 


토론 참가자들 중에서 공통된상황 처해 있는 사람은 모린 더피 뿐이었다. 영국에서 가장 초창기에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었던 더피는 레즈비언들의 삶을 다룬 소설 ‘The Microcosm’ 작가로, 책은 그보다 앞서 출판되었었다. 올해로 83세인 더피는 그날 저녁이 동성애자의 가시성에 있어 중요한 순간임은 분명하지만, 자신은 다른 동성애자들에 특권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프리랜서 작가였으니까, 동성애자임이 발각되어서 직장을 잃을 염려도 없었어요. 숨길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의견을 피력하기 수월한 위치에 있었다고 있죠.” 게다가 여성이었던 더피는 사생활이 범죄로 내몰릴 우려도 없었다. 당시 법은 남성간의 동성애만을항문성교라는 용어하에 종신형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드러내길 꺼려했던 남성들이 많았고, “여건이 되는 여성들이 대신 일어나 법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운동을 펼쳤다 한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 그러니까 Late Night Line-Up 방영된지 성추행법(Sexual Offenses Act 1967) 여왕의 승인을 받았다. 법에는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동성애 행위는 당사자들의 나이가 21 이상이고, 합의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 범법행위가 아니다 되어 있다. 영국 역사상 법이 남성간의 성행위를 대대적으로 허용 사례였다. 


성추행법의 제정은 1954 구시대적인 법제도를 현대화시키기 위한 목적하에 설립된 울픈든 위원회의 연구결과를 시행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기에 가능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 알프레드 킨제이를 비롯한 학자들의 업적과 개인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 덕분에 동성애에 대한 인식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고, 1957 울픈든이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동성애 행위를 범죄화해서는 안된다는 결론 내렸을 때는 캔터버리 대주교마저일반적으로 법도 개입해서는 안되는 신성한 사생활의 영역이 있다 이에 동의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리오 앱세이(Leo Abse). 1969년. 사진: Evening Standard/Getty Images

울픈든 위원회에서 결론이 공개되 동성애 법개정 협회(Homosexual Law Reform Society) 등의 압력단체들이 결성되어 기세를 더했다. 런던에서 열린 동성애 법개정 협회의 1 회의에는 저널리스트들과 정신분석학자 주교의 호소를 듣기 위해  수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의회는 계속해서 사안을 미루다가 1966년에야 해럴드 윌슨 수상의 정권이 애런 보수당 상원의원과 리오 앱세이 노동당 하원의원의 평의원 법안을 저지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법안은 101 16으로 하원을 통과하게 된다. 하지만 법안은 사적인 행위에 대한 규제 완화의 대가로 "공공질서" "품위" 중점을 두고 있는데 따라서 일부 성추행에 대한 처벌은 2년에서 5년으로 형량이 늘어났다.


이들의 노력은 자긍심과는 거리가 것이었는데, 애런 경은과거 감금된 경험이 있거나 앞으로 교도소에 입성할 이들은 차분하고 품위있게 처신하길 바란다 말을 남겼다. ,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란 소리였다. 


당시 17살이었던 카터는 법안 가결에 관한 기억이 희미하다고 한다. 그가 법안의 의의를 깨달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70년대 커밍아웃의 계기가 되었던 대학교 동성애자 협회도 비범죄화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자유롭게 만나 모임을 결성할 있게 되었죠.“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모일 만한 장소가 없으면 결국 크루징이나 묻지마 섹스로 치닫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곁눈질하며 긴장하던 사람들이 섹스를 위한 목적이나 타협, 두려움 없이 적절한 방법으로 대인관계를 맺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1967 당시 18살이었던 배우 사이먼 캘로우 또한 비범죄화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고 한다. “법안이 가결되기를 고대하며 TV 앞에 앉아 있진 않았어요. 당시 법적 상황이란 동성애자들을 감싸고 있던 전반적인 우울함의 일부분이었죠. 동성애자라고 하면 범죄자 아니면 끔찍한 변태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으니까요.” 학교를 마치고 서점에 취직한 캘로우는 Old Vic 극장에서 활동하던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올리비에는 캘로우에게연기가 그렇게 좋으면 직접 와서 보라 했고 마디가 캘로우의 삶을 바꿔놓았다고 한다. “극장에 가보니 지금까지와는 수많은 게이들이 굳이 자신의 성향을 입밖에 내진 않았지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도 완벽하지만은 않았다. “(극작가) 오튼이 케네스 할리웰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매표소 직원이 오튼과 절친한 사이였어요. 그곳에서도 게이들의 삶은 폭력, 범죄, 절박함과 무관하지 않았죠.”


동성애자들의 삶을 우울하게 하는 뿐만이 아니었다. “ 매표소 직원한테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책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굉장히 충격적인 소설이었죠. 크로스드레서와 매춘부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 책을 읽으며, 이렇게 되긴 싫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동성애의 긍정적인 묘사 결여되어 있었죠.”


하지만 희망이 전혀 없었던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호크니 축복이나 다름없었습니다. 60년대에 등장한 그는 게이들의 삶을 위트와 재미, 가벼움과 기쁨으로 훌륭하게 그려냄으로써 정말 힘을 준 것 같아요.”



사이먼 캘로우. 1979년. 사진: Alastair Muir/Getty Images



캘로우도 법개정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동의한다. 연극계와 같은 서브컬쳐 밖에서 게이들의 삶은 여전히 매우 고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혼자 성욕을 해결하거나 21 세 이상인 상대와 성관계를 맺는 건 문제 없었지만, 만약 집안에 제삼자가 있다면 법에 저촉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법이 아닐 없죠.” 뿐만 아니다. “ 2~3 동안은 경찰이 마치 동성애가 더이상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이 못마땅하기라도 법이 미치는 한도내에서 작정하고 사람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실제로 동성애 행위에 대한 처벌은 예전보다 증가했다. 캘로우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영국을 떠났고, 수많은 영국인들이 개방적인 분위기를 찾아 무슬림 국가 모로코의 탕헤르 같은 곳에 모여들었다고 회상한다. 


1968 런던을 떠나 벨파스트 대학교에 들어간 캘로우는 마치 타임머신을 기분이었다고 한다. (북아일랜드에서는 1967년도 제정법이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성애는 1982년까지 불법이었다.) “하지만 삶이 그리 단순하지만도 않은 , 거기서도 다들 법의 망을 피해다니며 아무 문제 없이 성생활을 누리더라구요.” 북아일랜드에서도 잘만 찾아보면 런던이나 탕헤르와 같은 자유분방한 삶을 즐길 곳은 있었다고 한다. “ 묵던 B&B 숙소에서 일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잉글랜드 출신이었고 끼가 굉장히 많았어요. 남자친구는 벨파스트 사람이었는데, 다른 남자들이 있을 자기 엄마로 분장하는 즐겼죠. 다들 서로를 무슨무슨 부인이라고 불렀어요. 번은 저녁 식사에 초대 받아 갔는데 다들 여장 차림으로 브릿지 게임을 하더라구요.”


비슷한 시기 벨파스트 서부에는 테리 스튜어트라는 청소년이 있었다. 카톨릭계 노동자 가정 출신인 스튜어트는당시 북아일랜드에선 엄격한 윤리관 때문에 동성애자는 고사하고 이성애자로 살기도 힘든 이었다고 한다. 겨우 13살이었던 그는 Late Night Line-Up 시청하거나, 데이빗 호크니의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스캇 맥켄지의 San Francisco 들으며 다른 삶을 꿈꾸곤 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자신이 학교에서 그렇게 따돌림을 당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동성애혐오였던 같다고 한다. 스튜어트는 18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눈을 뜨기 시작했지만, 세상에 자기 같은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그냥 혼자서 끙끙 앓기만 했다 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구원이 찾아왔다. 앨런 위커의 세계여행 다큐 Whicker’s World에서 미국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을 다룬 것이다. “그걸 보며, 나만 이런 아니었구나싶었죠. 물론 형은 아일랜드 카톨릭 신자가 그런 보면 된다며 당장 TV 끄라고 했구요.”


스튜어트는 동성애가 불법인 곳에서는 떳떳하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샌프란시스코는 못가지만 적어도 런던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런던에서 게이바를 두어번 드나들다가 아는 얼굴과 마주치게 된다. “아일랜드 알고 지내던 친구가 거기 있더라구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여기 기네스 정말 맛있네라고 하니까 친구가기네스는 무슨 지랄. 기네스 마시러 여기 오냐? 게이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그런가?’ 하고 얼버무렸죠.”



동성애자 해방전선 배너. 1971년. 사진: Clive Dixon/Rex/Shutterstock



70년대 중반에 이르자 법개혁에 힘입어 새로운 형태의 동성애자 모임이 대두하게 된다. 고향 친구로부터 런던 남부의 브릭스턴에 있는 불법 점거 건물에 대해 얘기를 들은 스튜어트는 그곳에 가보기로 한다. 스튜어트는 그곳에서 동안 40 명의 게이들과 함께 생활했고, 도로 청소부로 일하며 쓰레기 수거통을 뒤져 쓸만한 가구를 찾아내곤 했다. 한편 경찰은 이들을흑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동성애자들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한다. 


스튜어트가 그곳에서 지낼 때도 경찰의 습격을 당한 적이 있지만, 가끔은 경찰의 무관심이 무서울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우리가 살던 건물에 누가 화염병을 던진 적이 있는데, 마침 근처에 있던 터라 건물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경찰이 와서 보고는에이, 퀴어들이네라며 아무것도 하고 그냥 가버렸어요. 동성애자들을 겨냥한 폭력이 만연했지만 당국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이렇듯 불안정한 게이들의 처지가 스튜어트의 삶에 영향을 미친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80년대였는데, 여파는 엄청났다고 한다. 1981 어느날 아침 자전거를 보험에 들고 돌아가던 길에 들른 채링크로스 로드의 공중화장실에서 경찰에 연행되고 것이다. 화장실에는 스튜어트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연행되는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경찰은 체포사유가요구 행위라고 했다. 스튜어트는오해 마세요. 제가 무슨 도덕적인 사람도 아니고 묻지마 섹스도 하는데, 이번만은 아무것도 했다구요라며 반박했다. 그는 법원에서도 혐의를 부인했지만 결국 과반수평결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고 벌금 20 파운드형(오늘날의 80 파운드 , 12 상당) 처해졌다. 얼마전 More4 채널의 다큐멘터리 ‘Convicted for Love’ 출연해 당시 상황을 언급한 그는 아직도 그때의 전과기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대인관계가 넓은 편이었던 스튜어트가 체포되자 이성애자, 동성애자 없이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돕기 위해 나섰다. 현재해크니 왕립 자치구 독립 자문기관 대표로 활동중인 그는 자신이공동체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근데 진짜 왕립인지 묻자퀸들이 많으니까 왕립이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비범죄화 50주년을 맞은 소감에 대해 물어봤다. “부분적인 비범죄화죠. 완전히 비범죄화된 아니니까. “사적인 공간에서 법적성인이라는 표현에서 사적인 공간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파트너와 여관방을 잡고 섹스할 수도 있지만 그건 공적인 장소에 해당하거든요. 침실에서 문을 걸어잠근다 해도 건물 안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비범죄화되지 않은 영역이 너무 많은 거죠.”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원하던 직업을 구하는 데에도 지장이 컸다고 한다. “저처럼 재판을 받고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람들의 가정도 완전히 파탄났죠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어요.”


스튜어트는 이번 50주년을 맞아 자신과 같이 공공장소에서 요구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수천여 명의 남성들의 낙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련법은 2003년에 폐지되었지만 앨런 튜링에게 적용되었던 성추행 금지법과는 달리 사면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스튜어트는 7 27 앰버 러드 내무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 50주년을 착찹한 심정으로 맞은 스튜어트 뿐만이 아니었다. 법안 가결 당시 21살이었던 크리스 브로클스비는 성추행법이 암흑기의 단상과도 같다고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마치 지하조직의 일원 같은 분위기는 있었던 같아요. 다들 어떻게든 섹스를 즐기고 애인도 구하고 했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안감 같은 있었어요. 우리 세대는 지금도 그때의 불안감이라든지 빈민가의 일원이라는 느낌 같은 남아 있는 같아요.” 그는 한때 아무 거리낌 없이 게이들을 잡아넣던 이들에 대한 의심을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 전에 경찰이 소수인종과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제작한 공익광고를 적이 있는데 전혀 신빙성이 가더라구요.”


브로클스비는 비교적 진지했던 동성애 법개혁 협회가 뉴욕의 스톤월 폭동에 힘입어 동성애자 해방전선의 저항운동으로 전환하던 70년대초를 회상했다. “해방전선은 하룻밤 사이에 대두했습니다. 물론 그전에 동성애자 프라이드 행진도 있었죠.” 1972 처음 개최된 동성애자 프라이드 행진에는 2천여 명의 남녀가 몰려들어 하이드 파크를 가득 메웠다. 브로클스비가 행진에 참가한 그로부터 후였다고 한다. “교편을 잡고 있던 터라 아는 사람을 보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행진에 참가하기로 한다. “최종 목적지는 사우스뱅크에 있는 주빌레 가든스였는데, 발디딜 없이 인파가 모여서 깜짝 놀랬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암흑기는 또다시 도래했다. 1988 에이즈 사태가 극에 달했던 시절 영국 정부는 안그래도 비탄에 빠져 있던 동성애자 공동체를 걷어차 버리기로 한다. 악명높은 28조로 학교내 동성애홍보 함께동성애를 의사(疑似) 가정관계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금지한 것이다. “대처 수상이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분노가 극에 달했고, 저도 행진에 다시 참가했습니다.” 28조는 2003년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2000년에 폐지됨) 


더피도 브로클스비와 같은 생각이다. 그녀는 동성애자들 앞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미 승리를 거뒀다는 생각은 절대 해서는 됩니다. 언제든지 뒤집힐 있어요. 실제로 세상에는 동성애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여전히 존재하구요.”


1967년으로부터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동안 수많은 승리가 있었지만, 동성애자들은 만큼 수치와 탄압에 맞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스튜어트의 상황에서 있듯 성추행법의 제정으로 정부가 주도한 박해가 끝난 아니었다. 


더피는 아직도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 시절부터 수십년 동안 고문에 가까운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앨런 튜링의 케이스가 그렇죠. 그런 상처가 아물려면 오랜 세월이 걸릴 겁니다.”




- David Shariatmadari

- 옮긴이: 이승훈




How 1967 changed gay life in Britain: ‘I think for my generation, we’re still a little bit uneasy’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the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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