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2017-07-27



‘진정한 평등은 더 오랜 세월이 걸렸죠’ 동성애자들은 성추행법을 어떻게 바라볼까



독자들에게 성추행법이 가결된 1967년의 기억과 법안의 가결이 LGBT 인권 그리고 그들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물어봤다.



게이 프라이드. 1977년 7월: 법안이 가결된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중요한 평등권을 위한 투쟁은 계속되었다. 사진: Malcolm Clarke/Getty Images


“67년에도 딱히 해방감을 만끽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정의가 조금은 이루어졌구나 하는 정도였죠. 어쨌든 어떤 면에서는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게 됐으니까요.”


소위 영국동성애 해방의 일컬어지는 1967 7 27(성추행법이 여왕의 승인을 받은 ) 대한 콜린 리베트의 기억은 당시를 살았던 수많은 동성애자들의 반응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가디언지의 요청에 응한 독자들은 당시 제정법이부분적인비범죄화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 환희와 해방의 순간이었지만, 결국 작은 승리에 불과했고, 진정한 평등이 이뤄지기까지는 수많은 세월이 걸렸다는 것이다.




‘1967년은 평등을 향한 여정에서 필요했던 전환점이었죠.’ - 마크 S 서레이


저는 12 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967 6 7 수요일이었죠. 법안이 가결되기 전이었는데, 부모님과 함께  BBC2 다큐멘터리 보고 있었습니다. 게이들을 자연의 잔혹한 왜곡이 빚어낸 희생자로 묘사하며, 자살, 신체적 구타, 고독 등만 부각시키더군요. 행복하게 사는 게이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당시 선배한테 느끼던 성적매력이 뭔지 알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끔찍할 정도로 수치스러움과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방송이 끝날 때즘 어머니가 아버지한테게이 자식을 둔 부모들은 얼마나 힘들라고 했습니다. 결국 부모님께 커밍아웃하기까지는 16년이란 세월이 걸렸죠. 모두 편에 주셨지만,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며 주의를 주셨습니다. 


1967년을 계기로 일어난 주된 인식변화는 게이가 개종한 죄인, 포식자, 변태 범죄인라는 것에서불치병 안고 있는 희생양으로 바뀌었다는 거라 있을 겁니다.


당시 성추행법이 동성애를 부분적으로만 합법화시켰다는 점을 잊어선 됩니다. 제가 다른 남성과 처음으로 신체접촉을 가진 1974년이었는데, 우리 모두 19살이었죠. , 성관계 승낙연령 미만이었고, 장소 또한 성추행법이 규정하는사적인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범죄행위를 저지른 셈입니다. 


영국 최초로 생긴 대학교 동성애자 모임은 끊임없이 학교 당국의 조사를 받아야 했고, 21 미만의 게이 남성이 함께 자는 장면이 발각되어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수치심도 더해갔고, 초조함, 우울, 알콜 문제도 심각해진 같아요.


지난 50년간 삶은 고된 시기도 있었지만, 저는 그럴 때일수록 동성애자 인권 캠페인에 열성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특히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성과가 있었는데, 제 생각에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진건 2014 동성결혼법이 시행되면서부터였던 같아요. 1967년에 제정된 법이 게이들을 해방시켜 주진 못했지만 동성애자 평등을 향한 여정에서 필요했던 전환점인 것만은 분명하죠. 




‘1967 이전 게이들의 삶은 은밀하고 수치스럽기까지 것이었다.’ - 던건 (76)


법이 가결됐을 무척 기뻤습니다. 이젠 숨어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저같은 동성애자들은 마냥 행복해했죠. 전에도 굳이 행동을 자제한 적은 없었지만, 예전 법은 피해자 없는 범죄를 처벌하는 끔찍한 법이었죠.


현재의 던건

예전 게이들의 삶은 은밀하고 수치스럽기까지 것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런던은 동성애자들을 수용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차별은 있었죠. 동성커플들은함께 집을 빌리거나 대출을 받는 쉽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레즈비언들은 보증인이 필요했죠. 보증인이 필요없던 게이들도 친동성애적인 변호사를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제가 만나본 게이 중에 불법이라 성관계를 맺겠다고 사람은 밖에 없었던 같습니다. 다들 각자의 삶을 살았죠. 물론들킬위험은 항상 있었지만. 


그러니까 일상생활이 바뀐 아니지만 1967년은 해방과 희망의 시대에 평등을 향한 중요한 걸음이었던 분명합니다.


진정한 평등은 오랜 세월이 걸렸죠. (동성애자의) 성관계 승낙연령은 여전히 21이었기 때문에 성접촉이 있는 젊은이들이 대거 처벌 받았습니다. 제게 있어 진정한 전환점은 1997 토니 블레어가 크리스 스미스를 포함한 커밍아웃 동성애자 명을 각료로 임명했을 때였던 같아요. 




정부는 동성애자들에게 자행한 테러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 콜린 리벳 (74)


법안이 제정되고 2~3 동안은 제약조건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연인과의 성생활은 굉장히 제한적인 환경에서만 합법적이었죠. 파트너를 찾는 행위는비윤리적인 목적에 의한 강요라는 명분으로 처벌받곤 했습니다. 사랑이 비윤리적인 목적을 것이라는 판결을 어떻게 감히 내릴 수가 있죠?


67년에도 딱히 해방감을 만끽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정의가 조금은 이루어졌구나 하는 정도였죠. 어쨌든 어떤 면에서는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게 됐으니까요.



1998년 런던 프라이드 행진에 참가한 Glad to Be Gay를 부른 톰 로빈슨(가운데)과 그레이엄 노튼, 홀리 존슨. 사진: Piers Allardyce/Rex



경찰은 야외 수사를 벌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게이 배싱 협박이 이어졌죠. 로빈슨의 ‘Glad to Be Gay’ 가사 봐도 있듯, 처벌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편하게 앉아서 저들이 우리의 클럽을 죄다 폐쇄시키는 모습을 즐겨. 만남을 가졌다는 이유로 우릴 체포하고 퍼브를 습격하지. 남자친구가 21 이상인지 확인해 두는 좋을 거야. 친구들과 형제들은 잡혀들어가도 무사할테니 말이야.") 수많은 동성애자들과 가족들은 수십 년에 걸쳐 고통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이들에게 가한 테러 행위를 사죄해야 해요. 사면조치 내리는 모욕입니다.


1967년도에 제정된 성추행법은 결함이 없지 않았지만, 수많은 행동 단체들에게는 수많은 이점을 가져다 줬죠. 진보는 축하할 일이지만, 사람들에게 부분적인 평등만 부여하는 불가능하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우린 많은 것을 원했고 지금도 원하고 있죠.




- 가디언 독자들, Matthew Holmes

- 옮긴이: 이승훈 




'True equality took longer': gay people on the Sexual Offences Act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the Guardian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