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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토론토 중동계 LGBT 댄스파티의 설립자를 만나다



정처없던 십대 시절에서 성공회 목사가 되어 아라비안 나이트 LGBTQ를 창립하기까지 켈롤로스 살렙은 자신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아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한다.



Arabian Knights LGBTQ의 창립자 케롤로스 살렙(Kerolos Saleib). 사진: Courtesy Mitchel Raphael



16 교회 목사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케롤로스 살렙은 그때만 해도 일이 계기가 되어 노숙자로 전락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 


살렙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살렙은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서 캐나다로 이주해 몬트리올과 벌링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십대  가족은 미시소가로 이사했는데 그곳 주일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친구들의 괴롭힘으로부터 피난처가 되어준 교회가 그것을 간증으로 여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함께 다니던 콥트 정교회 예배당은 안식처와도 같았고 살렙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  


고해성사 커밍아웃한 살렙은 목사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자신이 잘못된 아니라고 안심시켜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목사는 신앙심 깊었던 살렙에게 이상 교회 행사나 예배에 나오지 말라며 부모님께도 사실을 알리라고 했지만, 부모님의 반응이 두려웠던 살렙은 주저했다. 결국 살렙이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을 틈을 이용해 목사가 집에 찾아와 부모님께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렸고,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모님은 목사의 조언을 따랐다. 


초등학교, 중학교 줄곧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평생을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온 저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집과 교회였는데, 그곳에서마저 거부당하고 사랑받지 못하게 겁니다. 제가 누군지 더이상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 자해행위로 치닫게 됐죠.”

 

살렙이 집에서 쫓겨난 고등학교를 조기졸업하고 뉴욕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기숙사로 들어간 그는 학위를 취득한 후에 The Walrus라는 잡지사의 홍보부에서 근무하다가 2008년에는 캘거리에 본사를 회사가 몬트리올에 홍보 담당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살렙은 몬트리올에서 지내는 동안 서킷 파티나 변조약물을 통해 현지 게이문화를 접하게 된다. 매주 케타민이나 코카인 같은 약물을 사기 위해 수백 달러의 돈을 썼고, 그렇게 약물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눠주곤 했다. 


도피하고 싶었던 거죠. 종교와 관련된 무조건 혐오했습니다.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고 하나님이라는 개념 자체를 증오했죠.”


결국 재정상황이 악화된 살렙은 에스코트까지 하게 됐고, 집세를 내지 못해 살던 곳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약물중독은) 그리 드문 케이스가 아닙니다. 도움의 손길을 찾거나 다른 LGBTQ들에게 다가가려다 결국 약물에 손을 대는 케이스를 적잖게 보는 같아요.”


그렇게 바닥에 다다른 살렙은 어떻게든 재기하고 싶었다 2010 그는 케냐의 사원에서 성직자로 있던 사촌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3개월간 보내게 된다. 그는 사원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을 이런 처지로까지 내몬 자해행위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게 거부당한 데서 비롯됐더라구요. 자신을 받아들이려면 필요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절박감과 고독감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케냐, 탄자니아)에서 2년반을 보낸 그는 워싱턴 DC에서 성공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에겐 게이 남성으로서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신앙심이 화합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설교자가 알려준 대로 따르기보다는 자신과 종교와의 관계를 나름대로 재정립했습니다. 설교자들이 하는 말은 결국 사람들의 견해니까요.”


2013 온타리오로 돌아온 그는 어떤 교회에서도 활동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을 돕는데 종교가 제한조건으로 작용하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소명이 있었다. 


올바른 일을 하는 성직자들은 굳이 성직칼라가 없어도, 특정 교회에 속해 있지 않아도 세상을 바꿀 있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Knights) 그렇게 해서 생겨났죠.”


2016 2 토론토에서 설립된 비영리단체 중동계 퀴어들을 위해 아라비안 나이트 LGBTQ 한달에 Club 120Black Eagle 등의 회장에서 한달에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문화를 즐길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목표는 자신을 찾아가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으로, 살렙은 자신이 어릴 때도 이런 공간이 있었더라면 힘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주최하는 파티는 중동풍의 하우스 음악과 드래그쇼, 벨리댄스 , 문화를 즐기기 위한 공간으로, 술탄의 몸종오일 레슬링 같은 테마 파티도 기획하곤 하는데, 달에 열리는 이벤트에는 많으면 300 명의 인파가 몰릴 때도 있다고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 파티. 사진: Courtesy Mitchel Raphael



아라비안 나이트 LGBTQ에서는 피티를  통해 중동계 중에서도 특히 난민들을 위한 영어수업을 위한 재정지원, 법률 조언, 섹슈얼리티와 신앙심, 가정문제, 토론토 지역사회에 융화하기 위한 상담 , 다른 프로젝트를 위한 모금활동도 겸하고 있다고 한다. 밖에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는 HIV/에이즈 관련 교육 예방을 위한 자원도 제공하고 있다. 


살렙은 섹슈얼리티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하는 중동계 퀴어들도 자신의 종교 정체성과 타협점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세상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아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겠죠.”


아랍 중동권 퀴어들은 종교, 문화 심지어는 LGBT , 자신이 속한 다양한 공동체로부터 수치심과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시리아의 난민사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무슬림 국가 출신자 입국금지 조치, 이슬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테러 등등, 중동계 퀴어들이 정면으로 맞서야 우리 사회의 초조함은 너무나도 많다. 살렙은 LGBT 공동체에서도 외국인혐오와 이슬람혐오가 증가추세에 있으며, 결과 언론이 아랍인 무슬림들을 겨냥해 양산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보다 솔직하게 사는 훨씬 낫다고 강조하곤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결국 드러나게 있으니까요.”


살렙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을 모두 용서하고 가족과 화해했다고 한다. 교회 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던 가족들도 어쩔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가족과의 화해는정말 놀라운경험이었다고 한다.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살다보면 어두운 시기도 있고, 그러다가 터널 끝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두운 시기조차 나의 일부분이자, 지금의 나를 있게 요소죠. 그걸 이겨낼 여러분은 리더가 있고 롤모델이 있는 겁니다.”




-  Mike Miksche

- 옮긴이: 이승훈




Meet the man behind Toronto’s dance party for LGBT Middle Easterners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Daily X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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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8




PrEP에 반대하기 위해 사이비 과학과 성수치심을 들이대지




<Maclean’s>가 PrEP에 관한 비과학적인 칼럼을 실었다. 




사진: Niko Bell/Daily Xtra



지난주 조쉬 더하스라는 기자가 <Maclean’s>에서 PrEP(HIV 확산을 막을 있는 ) 과연 게이들에게 적합한 약인지 의구심을 제기했다. 신약이 개발될  기자가 비주류 의견을 옹호하거나 까다로운 의문을 품는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더하스의 글이 위험할 정도로 그릇된 정보에 바탕을 두었고, 구조 또한 엉성하며, 개발될 때부터 PrEP 따라붙던 불공평한 수치심 강요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더하스가 본인의 이름을 걸고 제시한 전문 자료마저 그의 주장보다는 PrEP 지지하고 있으며, 더하스가 들이대는 증거 중에도 그의 결론을 뒷받침해 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더하스의 이러한 견해는 PrEP 대한 대중의 일반적인 혐오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하나하나 분석해 가치는 있다. 


먼저 PrEP 성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게이 남성에게 무조건 강요되고 있다는 그의 핵심논지부터 살펴보자:


스콧 평소에 여러 남성과 성관계를 맺을 항상 콘돔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요는 PrEP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스콧과 같은 전형적인 게이 남성에게 있어 사회적으로 안전하고 책임감 있는 선택이라는 점이다. 


일부 게이 남성들, 특히 도심부에 거주하는 이들 중에는 PrEP 복용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게이라면 무조건 PrEP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료인은 아무도 없다. 


더하스가 PrEP 사용을 홍보하고 있다고 지적한 온타리오주의 TheSexYouWant.ca라는 웹사이트에는 HIV 감염 예방책으로 뭐니뭐니해도 콘돔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되어 있다. 


필자가 지난 2년간 PrEP 관련 기사를 써오면서 인터뷰했던 의사들도 더하스의 연구대상자 스콧처럼 콘돔 사용에 전혀 문제를 느끼는 이들에게 굳이 PrEP 권하진 않을 것이다. 


더하스는 GetPrEPed.ca라는 웹사이트에도 비난을 가하고 있는데, 사이트를 운영하는 밴쿠버 단체, 남성 건강 프로젝트(HIM) 사업관리관 조슈아 에드워드는 “우린  누구에게도 이래라 저래라 하진 않는다 항변한다. “우린 지금 HIV 예방에 있어 전례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껏 가지 이상의 HIV 예방책이 존재했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한사람 한사람이 증거와 과학에 기반한 선택을 내리길 바랄 뿐이죠.”


에드워드와 온타리오주의 매니저는 더하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웹사이트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PrEP 파트너가 HIV 감염인이거나, 콘돔 사용에 문제가 있거나, 콘돔 없는 섹스를 즐기는 등  밖에 수많은 이유 때문에 감염 위험이 높은 이들을 위한 약이라는 점이다. PrEP 복용자가 너무 많다거나, 감염위험이 낮은 남성에게까지 강요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음으로 PrEP으로 인해 게이들은 콘돔을 버릴 것이고 따라서 임질, 클라미디아, 매독 등의 다른 성병의 확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더하스의 주장을 살펴보자: 


PrEP 둘러싼 가장 우려는 남성들이 대범해져서 콘돔을 버리게 거라는 점이다. HIV/에이즈 서비스 기관에서는 PrEP 복용하더라도 콘돔 사용을 권장하고 있지만, 콘돔을 쓰지 않으려고 PrEP 복용하 남성이 많다는 건 게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즉, 온타리오주의 HIV/에이즈 서비스 기관의 말을 빌자면본인이 원하는 섹스 즐기기 위해 PrEP 복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콘돔 사용을 포기하면 다른 성병의 확산이 그만큼 빨라질 것이다.  


PrEP 연구가들은 이러한 우려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고 있지만, 더하스 본인이 제시한 증거마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하스는 뉴잉글랜드주 약학저널 게이들이 PrEP 복용하면서 콘돔을 버리기 때문에 다른 성병에 걸릴 확율이 높다고 나와 있다며 링크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저널에는 그런 말이 나와 있지 않다. 먼저, 연구에서는 PrEP 복용하는 남성과 위약(偽藥)[각주:1] 복용하는 남성 사이의 감염율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위약을 복용하는 남자들은 자신이 복용하는 약이 진짜가 아니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조군이라고 한다) 따라서 진짜 PrEP 복용하는 이들과 아무런 행동상의 차이점이 없었다는 점이다. 더하스는 연구논문을 읽지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것이다. 


한편, 실제상황에서는 PrEP 복용자들의 기타 성병 감염율이 훨씬 높게 나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건 PrEP 복용하는 남성들이 콘돔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성병 감염 위험이 높은 남성들일수록 PrEP 찾거나 처방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좋은 일인 셈이다.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 이 약을 복용을 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그리고 PrEP 복용자들은 자주 HIV 기타 전염병 검사를 받기 때문에 다른 고위험군 남성들보다 질병을 옮길 확율이 오히려 낮다. 올초 시애틀에서 개최된 유명한 HIV 관련 회의에서는 수학적인 모델링 연구결과 발표되었는데,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게이 남성들이 PrEP 복용자들처럼만 행동한다면 (그리고 자주 검진을 받는다면) 전반적인 성병 감염율은 급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면역력을 지닌 성병은 일반적인 문제다. 그런데 문제점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는 사람이 PrEP 제재만이 답이라는 것이다. 반면, 공동체 단위의 종합적인 검진 치료야말로 효과적인 수단인데, 그런 면에서도 PrEP 복용자들 대부분은 모범적인 시민이라 있을 것이다. 


이어 더하스는 PrEP 아스피린보다 안전하다는 일반적인 견해까지 문제 삼으며, PrEP 심장질환 예방을 위해 매일 복용하는 아스피린에 비유하는 이러한 견해 거짓된 것이라고 한다. 


의사도 표면화까지 수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부작용들에 우려를 드러냈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 부작용의 가능성은 은폐된다. 예를 들어 토론토 제약 사이트의자주 묻는 질문코너에는 PrEP아스피린만큼이나 안전하다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러한 결론은 PrEP 부작용을 심장혈관상의 위험을 막기 위해 성인이 매일 복용하는 아스피린의 부작용과 비교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스피린도 PrEP 부작용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PrEP 부작용은 구토증세나 두통 같은 경미한 것에서 신장기능 골밀도의 변화와 같은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이트의 주장을 잘못 이해했다 해도, 미국인 5분의 1 예방용으로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있다. 요컨대 아스피린의 부작용이 심장질환의 경미한 예방효과를 위해 수백만 미국인에게 처방해도 무방할 정도라면 그보다 부작용이 적고 HIV 철벽같이 막아주는 PrEP 수만 명의 게이남성들에게 제공할 있어야 한다. 


PrEP 부작용을 일으켰다는 드문 케이스는 대부분 더하스가 언급하는 경우와 같다:


PrEP 복용을 시작한지 달이 지나자 살이 빠지면서 피로감을 느꼈고, 주변으로부터 아파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10개월이 되었을 의사는 신장기능에 이상을 발견하고는 PrEP 복용을 중단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약을 끊은지 달만에 몸무게도 예전으로 돌아왔고, 피로감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이런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PrEP 복용할지는 개인이 결정할 문제지만, PrEP 복용에 따르는 부작용은 자신이 겪은 것만 해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


PrEP 복용하다가 건강이 좋아졌지만, 의사가 부작용을 바로 발견하고 복용을 중단시켜,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렇듯 PrEP 복용자들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받는 인구군이다. 이건 약물의 부작용을 제대로 관리한 사례인 것이다. 


필자도 PrEP 환상을 가져서는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연구결과들이 나옴에 따라 우리는 자신이 복용하는 약이 어떤 약인지, 어떻게 복용해야 할지 경계심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접근해야 것이다. 게다가 PrEP 부유하거나 보험 적용을 제대로 받는 일부 도심부의 게이 남성들만 구입 가능한 , 보험이 없는 이들은 해외에서 합법성이 의심되는 PrEP 주문해 의사의 감독 없이 복용하고 있다는 , 그리고 나라에 따라 PrEP 복용에 따르는 비용과 지원이 극단적으로 다른 현실 , 앞으로 맞서야 실질적인 문제점도 산적해 있다. 


하지만 더하스의 기사에는 이해할 없는 부분이 있다. 자신이 인터뷰한 전문가가 PrEP 게이 남성들에게 유용하고 중요하다고 했고, PrEP 안전하고 효과적이라는 문헌을 한가득 검토했는데도 어떻게 반대의 결론을 내릴 있는 걸까?


더하스는 결말부에서도 그의 유일한 정보 제공자 스콧의 말을 인용한다:


단지 난잡한 생활을 보내기 위해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르는 약을 장기간 매일 복용한다는 건데, 저는 가치를 모르겠습니다.”


단지 난잡한 생활을 보내기 위해서라...


필자는 스콧이라는 자가 누군지도,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더하스가 굳이 결말부에서 말을 인용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러 증거를 무시해 가며 그가 펴고 있는 주장은 지금까지 PrEP 대한 거부감이 그랬듯, 한가지로 요약할 있다. , 원하는 대로 성생활을 즐기는 게이 남성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기 위한 이다. 


PrEP 관련 토론 수준이 조금 높았으면 좋겠다. 




Niko Bell

- 옮긴이: 이승훈




Stop using pseudoscience and sex shaming to argue against PrEP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the Guardian.



  1. placebo: 어떤 약 속에 특정 유효 성분이 있다고 환자를 속여 그 효과를 시험하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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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6




만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시스템: 아이의 호적에서 성별란 삭제하기 위해 분투하는 캐나다 트랜스젠더




트랜스젠더인 코리 도티는 자신의 아이 시릴이 성이 표기되지 않은 보건카드를 발급받았지만, 이건 광범위한 투쟁의 작은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캐나다인 트랜스젠더 코리 도티는 이분법적인 성별 시스템이 그 속에서 적응하고 순응하는 이들에게조차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지적한다. 사진: Kori Doty


최근 영아가 성이 표기되지 않은 보건카드를 발급받은 가운데(세계 최초로 여겨지고 있다) 영아의 부모는 아이가 커서 자신의 성별을 직접 결정하도록 하겠다 밝혔다. 


가디언지의 인터뷰에 응한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인 코리 도티는사람들이 성별정체성과 성기는 직접적으로 연관된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같다 한다. 논바이너리는 자신을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보지 않는 이들을 말한다. 



아이를 고정관념에 가둬서 핑크색 러플만 입히거나 파란색 트렁크만 입히고 싶진 않아요.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요. 아이가 잘못된 성별로 자라는 대신 자신의 정체성을 직접 밝힐 있도록 말이죠.”


캐나다 당국이 영아 시릴 애틀리에게 성별 표기가 되지 않은 보건 카드를 발급하자, 공식서류에 성별 지정을 삭제하기 위해 투쟁을 이어온 활동가들은 이번 일을 승리라며 반기고 있다.


하지만 지난 11 지인의 집에서 시릴을 출산한 도티는 시릴의 출생증명서에 성을 표기하지 않기 위해 여전히 투쟁을 벌이고 있다. 투쟁은 다년간 이어진 광범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도티는 다른 트랜스젠더 간성인 일곱 명과 함께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출생증명서에 성별을 기입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주장 하에 브리티시 콜롬비아주를 상대로 인권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들이 소송을 제기한 주된 원인은 오직 가지 성만 존재하며, 아이가 자라서 어떤 성별 정체성을 가지든 하나로 분류된다는 추측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확한 추측에 순응하기 위해 갈등하거나, 본인의 정체성을 반영해 주지 못하는 신분증을 들고 다니며 악몽 같은 경험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2015 브리티시 콜롬비아주 인권 재판소는 이들의 소송을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도티(31) 이번 재판이특정 구조 시스템이 모든 이들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이라며이분법적인 성별 시스템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이들에게 마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주장한다.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는 시스템이죠.”


도티는 성별을 스펙트럼으로 봐야 한다며, 그렇게 하면 트랜스젠더나 간성인 뿐만 아니라정서상의 복지와 단절된 울음을 참기를 강요당하며 유해한 남성성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모든 남자아이들, 조립이나 수학을 해선 안되며 힘이 세도 안된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는 모든 여자아이들에게도 도움이 이라고 한다. 


시릴이 태어났을 브리티시 콜롬비아주는 호적에 성을 기입해야 한다며 출생증명서 발급을 거부했고, 도티는 브리티시 콜롬비아주 인권 규정은 물론 캐나다의 인권법성별 표현이 보호된다며 소송을 제기했었다. 


이에 당국은 얼마전 성을 U라고 표기한 보건카드를 발급해 시릴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있도록 했다. 도티는 U 미정(undetermined) 또는 미지정(unassigned) 뜻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건부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카드를 발급한 것도 하나의 승리지만아직 투쟁이 끝난 아니다 한다


출생증명서가 없는 시릴은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의 시스템에서 시민으로 등록될 없다. 도티와 함께 소송을 준비중인 인권변호사 바바라 핀들리는 늦가을 심리가 열릴 것이라고 한다. (핀들리는 자신의 이름을 대문자로 표기하지 않는다.)


출생증명서에 성을 표기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오직 남자만이 투표를 있고, 오직 남자만이 재산을 소유할 있었으며, 오직 남자만이 상원직에 오를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시대는 벌써 예전에 끝났어요. 과거 출생증명서에는 인종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듯이, 이젠 성도 출생증명서에서 삭제하고 인종과 마찬가지로 개인정보로 취급해야 때입니다.”


소송을 준비하는 도티에게는 지지와 성원, 비난의 목소리가 함께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남성 인권 포럼에서도 회자되고, 기사에도 오르내리고 있죠. 양육방식이 학대나 다름 없다구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고 잠자코 있기엔 댓가가 너무 크다고 도티는 말한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트랜스젠더의 40% 살아가면서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 애가 자라서 어떤 성별을 가지든 그것 때문에 불안을 느끼며 살진 않았으면 해요.”


보건카드의 발급은 하나의 진전이지만, 최종적인 목표는 모든 공식 서류에서 성별란을 지우는 것이라고 한다.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시스템 변화를 위한 겁니다. 서류발급처의 기능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가 사람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 우리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는 법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이죠. 한번에 끝나는 싸움이 아닙니다.”


• 본기사는 2017 7 7 보건카드에 시릴의성별(gender)’ U 표기되어 있다고 부분을(sex)’으로 수정했습니다. 본기사는성별 잘못 표기한 부분을 모두(sex)’ 또는성별란(gender marker)’으로 정정하였습니다.




- Ashifa Kassam

- 옮긴이: 이승훈




'The system's violating everyone': the Canadian trans parent fighting to keep gender markers off c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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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6




아랍계 퀴어남성인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이게 됐다.




동안 SNS에서 섹슈얼리티를 밝히지 않은 나, 더이상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사진: Christian Horz/iStock/Thinkstock



엄마가 페이스북 게시글에좋아요 누른 보니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몇달전 런던 프라이드 게이 이프타르가 제공되었다는 기사를 올렸었다. 이프타르란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 단식을 끝내고 드는 식사를 말한다. 나는 17 이후로 단식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기사였다.


삶에서 이슬람과 동성애는 결코 함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말이다. 불가지론자, 아니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그래도 이런 기사를 보면 정체성 사이의 틈이 매워지는 같다. 그런데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2007 처음 페이스북에 가입했을 때부터 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 친구로 등록되어 있다. 언제 누가 누구한테 친구신청을 보냈는지 일일이 기억나지도 않을 뿐더러,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처음엔 말이다. 


중동계 대가족은 말이 많다. 레바논 사람들 중엔 남얘기 하는 유일한 낙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집처럼 친척이 많으면 그만큼 소문도 멀리 퍼진다. 나는 18 때부터 섹슈얼리티 때문에 수많은 소문의 표적이 되었다.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것도 그렇고, 나보다 나이가 배나 많은 사람과 사귄 것도 그랬다. 그런데 페이스북에서까지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면 말이 많아질 같았다. 


그래서 SNS에서는 굳이  섹슈얼리티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종교와 섹슈얼리티가 연관된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더 조심하게 됐다. 그러면서 프라이버시를 중시여긴다는 변명하에 이런 나를 정당화시켰다.


프라이드 관련 기사는 올렸지만, ‘게이 프라이드라고 하지 않는 이상 친척들은 그게 뭔지 몰랐다. 사진도 일반적인 것만 올렸는데, 친척들은 디스코볼이나 비어가든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만 보고는 그곳이 퀴어 공간이라는 없었다. 물론 무지개 깃발 사진은 피했다.


아무리 커밍아웃을 하려 해도 커밍아웃이 완전하지 않을 신경에 정말 거슬리곤 한다. 나는 아끼는 사람들(친한 가족들)한테는 커밍아웃했지만, 페이스북에서는 18 때처럼 자신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한채 벽장 속에 숨어 있었다. 


2015 프라이드 시즌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에 무지개 필터가 씌워져 있는 봤다. 나는 프로필 사진을 그대로 두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게이라는 사실에 떳떳하다고 생각했는데, 필터 하나 쓰는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부정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한 때가 처음이었다. 지금처럼 페이스북에서 계속 자신을 숨기는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말 나도 프로필 사진에 무지개 필터를 추가했다. 


조그만 행동은 내가 섹슈얼리티와 관련해 SNS에서 취한 가장 공공연한 선언이 되었고, 엄마와 성건강이나 다른 LGBT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게 계기가 되었. 그건 내가 절실히 바라던 해방감이었다. 나는 이반 관련 기사와 함께 의견도 올리기 시작했고, 퀴어나 다른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이슈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일부 친척들은 차단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이프타르 기사에 엄마가 좋아요를 누르자, 형들도, 사촌도 그리고 형수까지 좋아요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픈된 공간에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준다는 개인적으로 혁명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가족들의 지지는 내가 속한 문화와 섹슈얼리티 사이에서 느끼던 간격을 좁혀주기도 했다.


지난주 CNN 베이루트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프라이드 행사 관해 보도했다. 우리 가족은 레바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프타르 기사보다 훨씬 친근감을 느끼는 소식이었다. 나는 기사도 공유했다. 이번엔 엄마는 물론 누나도 좋아요를 누르며 이런 댓글까지 달아줬다. 


대박!!!!! 이젠 프라이드할 때도 됐지!”




- Mike Miksche

- 옮긴이: 이승훈




How Facebook helped me reconcile my sexuality as a queer Arab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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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캐나다, 드디어 트랜스젠더 인권법안 가결 




법안 C-16호는 캐나다 인권법으로 성별정체성과 성별표현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다. 




2017년 5월 13일 토론토 시청 앞에 게양된 무지개 깃발과 트랜스젠더 깃발. 사진: Nick Lachance/Daily Xtra



다년간에 걸친 노력끝에 트랜스젠더 인권이 드디어 캐나다 법에 명시된다. 


성별 정체성과 성별 표현을 캐나다 인권법으로 보호하고, 증오범죄 조항에도 포함시키는 C-16호가 상하원을 통과했다. 


2017 6 15 법안은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딛혔지만,  67 11 상원을 통과했다.


하퍼 정권 때도 트랜스젠더 인권법안이 하원을 가결되었지만 상원에서 좌절된 있다. 


법안 C-16호가 시행되면 트랜스젠더들은 캐나다 전역에서 법적 보호를 받을 있게 된다. 한편 2017 6 13일에는 유콘주도 지방정부로는 마지막으로 트랜스젠더 인권법을 가결시켰다.


상원에서는 법안 C-16호를 두고 격한 논쟁 오갔으며, 일부 보수당 의원들이 법안의 보장 내용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다.


수차례 개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원본 그대로 상원을 통과했으며, 이달말 여왕의 재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 Arshy Mann

- 옮긴이: 이승훈



Canada has finally passed a trans-rights b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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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9




흑인 논바이너리라는 이름의 정치반란





흑인 사회에는 젠더불순응이 자리가 거의 없지만, 내겐 구명줄과도 같다.





사진: belle ancell



나는 흑인이자 논바이너리다. 한편으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지만, 다른 한편으론 정체성의 이런 조각들에 대해 이해하고 내세우게 최근에 이르러서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보통분법으로 나뉜다. 흑인 아니면 백인, 동성애자 아니면 이성애자, 남자 아니면 여자 등등. 그리고 우린 대부분 자신과 그다지 상관이 없거나 심지어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 해도 이런 분류 속에서 대인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오직 가지 선택만 주어지는 이런 분류는 혼혈이자 논바이너리 퀴어인 내가 공간을 주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혼혈이라는 사실 때문에 갈등하며 보냈다. 백인들과 어울리기엔 너무 검었고, 흑인들과 어울리기엔 검었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에게 있어 인종문제는 끝없는 갈등거리지만, 나는 나름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납득하고 수용하게 되었다.


반면 나의 성별 정체성은 아직도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린 태어날 누구나 성별을 지정받는다. 그리고 순간부터 우린 성별에 따라 받아들여진다. 물론 시스젠더[각주:1]들에겐  문제가 없다. 본인의 성별 정체성이 지정 받은 성별과 일치한다는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니까 말이다. 하지만 밖의 사람들에겐 보건, 교육, 대인관계 등등 일련의 불타는 링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나마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성별중립적인 양육을 옹호해 오던 분이라 행복한 편이었다. 엄마가 이런 표현에 동의할진 모르겠지만, 사회가 여자아이에게 거는 기대에 끼워맞추지 않는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만은 알고 계셨다.  엄마는 바비인형보다는 액션피겨를, 핑크 드레스보다는 츄리닝 바지를 좋아하는 성향을 부추겨 주셨다. 하지만 그렇듯 중학교 생활은 말도 되는 가부장주의로 꿀꺽 삼켜버렸고, 나는 12 때부터 마스카라를 하고 다리털을 밀기 시작했다. 내가 다녔던 지루한 영국 중학교는 여학생들한테 치마를 강요하면서도 다리를 어디까지만 드러내야 하는지, 구두는 닦고 다니는지, 남학생들의 주의를 끌지 않는 색깔의 브래지어를 차고 다니는지 일일이 검사하는 곳이었다. 


혼혈아로 자란다는 건 복잡한 경험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는 대부분을 백인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나도 엄마처럼 혼혈(자메이카, 감비아, 백인 혼혈이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 나의 흑인 핏줄엔 크게 공감하지 않고 자랐다. 어릴 엄마한테 나도 백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 나더러 샤워할 얼굴에 진흙도 같이 씻어내라 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뚜렷한 인종차별적 발언 때문에 나는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세상은 나를 흑인계라고 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6살이 되어 국제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백인성에 둘러싸여 살아온 나는 피부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는데, 화학제품으로 스트레이트 퍼머를 한다거나, ‘표준 영국영어 구사한다거나, 오로지영국인이라는 정체성만 가지고 산다거나, 심지어는 조별토론회 이민자 수용에 반대하는 한다는 식이었다. 때는 몰랐지만 자신을 이런 식으로 표백하는 자존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다른 흑인이나 유색인종을 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흑인들과 어울리며, 흑인 작가들의 글을 읽고, 흑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흡수하며 이런 부분도 차차 바뀌어갔다. 하지만 복잡한 정체성 외에도 나는 내게 있어 성별과 퀴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나는 논바이너리로서 살아온 삶을 정치적 반란이라고 표현한다. (누구나 그런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이분법적 성별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흑인 사회에서는 젠더불순응이 자리가 별로 없다. 그건 흑인의 몸에 젠더화 또는 탈젠더화된 가능성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흑인성을 인지하는 방법 때문이라 있다. 이는 젠더를 스펙트럼이나 무수한 가능성으로 보기보다는 엄격한 이분법(남자 아니면 여자) 보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역사를 통틀어 흑인의 몸은 백인우월주의를 거들기 위해 끊임없이 성별로 분류되어 왔다. 예를 들어보자. 식민주의와 노예제도를 통해 흑인여성의 몸은 정복당해 왔고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노예제도 하에서 흑인은소유물이었기 때문에 인권같은 없었다. 따라서 흑인여성은 아무리 성폭행 당해도 신고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대 때는 흑인여성의 강간과 지배가 침략과 식민지화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아프리카 여성은 물론 거북이섬[각주:2] 여성들까지 성추행은 학살의 도구로 쓰였다. 이들 여성의 용도는 육체노동 밖에 없었다. 흑인 사회를 성별로 분리시키는 것은 식민주의, 노예제도, 인종분리 정책 백인우월주의 프로젝트의성공 없어서는 안될 메카니즘이었던 것이다. 


젠더화된 ()흑인성은 역사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코이코이족 출신이었던 사라 바트만 1700년대 백인들의 구경꺼리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백인들은 사라의 몸을 구경했다. 그녀의 엉덩이와 몸매는 너무 풍만해서 마르고 창백한 백인들의 미적기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한편 2016년에는 패트리스 브라운 사진이 화제를 모았다. 4학년을 가르치는 교사 치고는 복장이 너무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사람들이 지적하고 싶었던 그녀의 각선미였다. 사람들이 하려고 했던 말은 브라운의 ( 흑인 여성의 )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300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똑같은 시선의 희생자가 되었다. 여성 모두 체형 때문에 과도하게 성애화되면서도 성적 주체성은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흑인에게 부과된 이러한 엄격한 성별역할은 해로운 선입관과 인식을 동반하게 되는데, 내가 이분법적인 성별을 거부하게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엇다. 실제로 이분법적인 성별은 여성과 여성성을 억압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흑인여성들을 극단화된 성차별이라고 하는 역설 속에 영원히 가둬놓기 위한 것이라 있다. 나는 앞으로도 흑인 여성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겠지만, 정체성은 논바이너리이다. 


패트리스 브라운 때처럼 사람들은 몸과 화장, 스타일을 보자마자 추측과 판단의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이러한 서사에서 결코 벗어날 없겠지만, 흑인여성에 대한 잣대를 거부함으로서 내부의 평화와 강인함을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애쉴리 섀클포드가 논바이너리 펨에 관한 유명한 에서 말이 있다. 검고 뚱뚱한 몸을 가진 탓에 연상의 남자들은 그녀를 과도하게 성애화해도 된다고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흑인 여성성은 시끄럽고 강인하고 용감하며 공격적이라는 이유로 남성화되는 경우가 많다. 섀클포드는 이러한 경험 때문에 자신의 성별은 결코중성화 없을 거라고 하지만 (여성호칭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여기는 이유는이분법적 성별을 이행하는 데서 오는 엇갈린 신호와 절박함을 더이상 소화해낼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섀클포드는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젠더는 여정을 거쳐왔고,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있으며, 저항의 세계를 품고 있다. 상대방이 성별을 짐작하기 전에 입으로 성별을 밝히는 행동 하나하나가 공동체의 역량인 것이다.“


섀클포드의 말은 줄곧 내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섀클포드의 글을 읽으며 빼빼 마르고 중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백인과는 다른 논바이너리의 경험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백인성 안에서 짜여진 것과는 다른, 논바이너리에 대한 나만의 이해를 구축할 있었다. 


사람들은 성별에 대한 구식 관점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바이너리들의 목소리도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분법적 성별을 해체하는 것이 그러한 분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득이 되는 아니다. 이분법적 성별은 우리 모두, 특히 여성을 제한적이고 폭력적인 기준에 옭매기 위해 구축된 사회적 틀이라는 점에서 누구나 이러한 이분법에 맞설 있고 맞서야만 한다. 


성별 이분법( 해체) 흑인의 몸을 ()식민지화하는 있어서 근본적인 부분이다. 흑인 남자 아이들도 있고 나약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흑인 남자 또한 과도한 범죄화와 포식성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흑인 남자아이도 낙인이나 동성애혐오 없이 여성스러울 있어야 하며, 흑인 여성 또한 무책임하거나래칫[각주:3]이라는 선입관 없이 편모가정을 꾸릴 있어야 한다. 흑인 여성도 이중잣대 하에 비난받는 없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논바이너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는 다양하고 복잡한 경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흑인 논바이너리들은 자기 비식민화를 거칠 때에만 정체성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있다. 사회는 기존과는 다른 흑인, 꺼벙하거나, 요상하거나, 퀴어하거나, 밖에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해진 편협한 선입관에서 벗어난 흑인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흑인에게 가해지는 편협한 성별 역할은 노예제도와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흑인 사회는 이러한 것들을 자기것으로 내면화시키기도 한다. 흑인 퀴어나 다원적 성별을 가진 이들이 다른 공동체를 이루거나 찾아나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내게 있어 Black Lives Matter 운동은 무조건적인 수용과 흑인 몸에 대한 긍정의 공간이다. Black Lives Matter 흑인 퀴어와 트랜스젠더 들에게 있어 사정없이 힘과 용기를 얻는 운동이라 있다. 웹사이트에는 운동의 최우선사항으로트랜스젠더 긍정퀴어 긍정 언급되어 있다. 나는 흑인 논바이너리로서 Black Lives Matter 밴쿠버 활동을 조직하며 정말 뿌듯한 경험을 있었다. 다른 시민권 운동과는 달리 여성, , 퀴어, 트랜스젠더 흑인들이 전면에 나설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흑인해방운동을 수용적이고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려면 성별 반란이 포함되어야 한다. 나는 정치의식의 살아있는 결정체다. 




- Cicely-Belle Blain

- 옮긴이: 이승훈




The political rebellion of being black and non-b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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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isgender: 시스젠더란 트랜스젠더에 대응하는 용어로, 신체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시스 남자라고 하면 신체구조도 남자고 본인의 성별 정체성도 남자인 경우. [본문으로]
  2. Turtle Island: 북미대륙. 일부 북미 원주민들의 용어로, 원주민 인권 활동가들은 지금도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3. ratchet: ‘저속한 빈민 흑인여성’ 또는 그런 언행, 문화를 가리키는 속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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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장애인 기혼남 고객을 만나며 느낀 것들 (하)




사람의 관계를 보며 나는 사랑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삽화: Indiana Joel/Daily Xtra



(전편)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는 몸을 잡았고, 나는 그의 몸에 반즈음 올라타서 위에서 지긋이 눌렸다. 그렇게 키스를 나누며 애무를 하는 동안 단단해진 거시기가 그의 몸을 찔러댔. 나는 그의 사타구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거시기는 물렁했다. 


때도 있고 때도 있어서..”


괜찮아요. 해야 하는 아니니까.”


그는 살짝 밀치더니 몸을 구부려서 거기를 빨기 시작했다. 가누는 걸 힘들어 해서 거시기를 가능한 그의 얼굴쪽에 가깝게 대줬다. 다행히도 침대가 커서 내 머리가 침대 밖으로 삐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놀랄 정도로 테크닉이 좋았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빨리 사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빨리 오르가즘으로 이끌어줬고, 나는 그만 입에 싸버렸다.


이렇게 빨리 사정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다시 발기한다 해도 최소한 30분은 걸리기 때문에 섹스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렇게 빨리 사정해 버렸는데도 그는 전혀 실망한 기색 없이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 누워 있었다. 잠시 나는 그의 얼굴을 들어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그를 팔에 눕히고 있자니 궁금해지는 많아졌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난감했다. 보통 오르가즘을 경험하고 나면 자기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게 되는데, 이번엔 나만 사정을 터라 상황이 좀 달랐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남편분힘드시겠어요.”


그렇죠. 전에는 밖에도 나가고 여행도 가고 했죠. 요즘도 나가긴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아서 예전만큼 자주는 나가요.”


그럼…” 나는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친밀한 시간도 가지고 그러세요?”


그는 웃었다. 


섹스?”


.”


아니.”


중풍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뭐, 중풍 때문에 상황이 예전같지 않은 맞지만, 그렇다고 어색한 아니고. 게이 커플이 원래 시간이 지나면 별로 섹스를  하게 되잖아.”


남편분이 이렇게 에스코트 부르는 것도 알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럼 남편분은 그냥 아무것도 안하시나요?”


누구 만나고 다니겠지. 굳이 그런 얘기는 서로  하고 지내서... 나는 사람을 집에 부르는 훨씬 편하더라구. 내가 밖에 나가는  힘드니까. 근데 사람은 나가서 자기 볼일도 보고 그래요. 주로 집에 있으니까 사람은 내가 누굴 만나는지 알지만, 사람은 누굴 만나는, 별로 신경 써요. , 그것 빼곤 문제 없지만.”


우린 아무말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는 동안 머리는 없이 돌아갔다. 이건 과연 행복한 삶일까, 슬픈 삶일까? 사랑하는 서로 사랑해서 만났는데, 성생활은 년도 끝나버리고,그래도 함께 산다는 어떤 심정일까?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그렇게 이상한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오래된 게이커플 중에는 밖에서 성욕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말대로 계기가 달랐다 한들 결과는 똑같았을 수도 있. 


그쪽은 어때요?” 그가 침묵을 깼다.


저요?”


사귀는 사람 있어요?”


내가 얼굴을 들여다 없지만 얼굴이 상기되 느껴졌다. 


아뇨.”


전에는?”


만나본 적은 있는데 1 이상은 안가더라구요. 그리고 하기 시작한 후론 만나는 사람은 없었죠.”


그런 삶은 어때요?”


성노동이 상담 세션으로 둔갑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보통은 내가 상담자 역할을 하게 된다. 나도 여행간 경험이나 지금 쓰는 등등, 자신에 대해 조금 털어놓긴 하지만, 연애사에 대해서는 일절 노코멘트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답을 해야 할지 말지 머뭇거렸다. 


언젠가는 연애도 하고 싶죠. 근데 지금은 딱히 생각이 없어요. 하는 동안은 만날 생각 없는데, 아직 일을 관둘 마음은 없고.. 그렇죠.”


나는 대충 얼머무리 가만히 누워 있었다. 기분이 상한 아니지만, 말투에서 기분 상한 인상을 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후 그는 나를 살짝 껴안더니 목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되면 만나게 있으니.”


약속한 시간이 거의 돼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실례를 구하고 거시기를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을 나와 그가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나는 처음부터 옷을 벗어던졌던 반면, 그는 내내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노동을 하다보면 상대방이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얘기를 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 한다. 그런데 지금은 상대방이 아닌 내가 몸도 마음도 벌거벗은 상태였.


옷을 입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처럼 이번에도 그가 나를 데리고 내려왔다. 거실에 도착하자 그는 또다시 숨을 헐떡거렸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방금 우리가 교감한 것들을 되돌아봤다. 그가 에스코트에게 얼마나 자주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 고객에게 이야기를 하는 적이 없다. 


바로 남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만나서 반가웠습니다더니 곧바로 윗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에게 키스를 했고, 그는 팔로 허리를 감쌌다. 떠날 때즈음 그는 현관옆 테이블 서랍을 열더니 돈뭉치를 꺼내서 내게 건냈다. 나는 돈을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키스를 했다. 


그럼 또 봐요.” 나는 현관으로 향하며 그에게 윙크했다.


그럽시다.”


도로로 나오며 뒤를 돌아보니 그는 문을 닫기전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가락으로 지폐를 세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 Devon Delacroix

- 옮긴이: 이승훈




What I learned about myself during an encounter with a disabled married client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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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6




장애인 기혼남 고객을 만나며 느낀 것들 (상)




보통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상담자 역할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삽화: Indiana Joel/Daily Xtra




현관문이 열렸을 조금 놀랐다. 만나기 전에 이메일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나는 상대방이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늘 세션은 키스와 애무, 오랄 사정 등등, 평범한 것이었지만, 상대방의 상황이 조금 특수했다. 몇년전 중풍이 와서 몸의 왼쪽이 마비된 것이다. 팔은 기능을 있을만큼 회복되었지만, 다리는 거의 움직이지 못해서 보조기 신세를 지고 있고, 어디 다닐 때는 보조기와 목발을 함께 쓴다고 했다.


이미 이런 얘기를 나눴던 터라 사지 멀쩡한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오니 혼란스러웠다. 느슨한 반바지 차림이라 다리에 아무 이상이 없는  척 봐도 있었다. 남자는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보고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닌 것 같았. 긴장감을 숨기려고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고객이 간혹 있긴 하. 그런데 남자는 아예 감정이 없어 보였다. 마치 존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사무실처럼 보이는 옆방으로 들어갔고, 방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멍하니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쩌라는 거지? 돌아가란 소린가? 준비할 거라도 있는 걸까? 장애 정도를 너무 과장한 아닌가? 혹시 이거 무슨 장난이라도 치려는 걸까?

 

가방 들고 나가려 찰나 위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걸음 걸음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소리였다. 발소리의 주인공이 시야에 들어왔을 , 나는 오늘 내가 만날 고객이 바로 사람이란 깨닫게 되었다.


전에도 장애가 있는 고객을 몇몇 만난 적이 있는데, 보통 친구를 불러 집에 함께 있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신체 건장하고 어떤 도덕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없는 사람을 만난다는 겁이 있기 때문이다. 폭행이나 강도 혹은 당할 경우에 대비해 3자를 집에 부르는 것도 좋은 생각이긴 하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 그는 머리는 밀었고 수염은 단정하게 정리한 50대의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그도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보조기에 들어간 다리는 말라 있었다. 


복도에 내려온 그는 숨을 헐떡거렸다. 나는 남자가 이러다 쓰러지는 아닌지 불안했지만, 그는 그런 나를 보고 미소를 짓더니 손을 내밀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는그럼, 올라갈까요?”하고 물었다.


인사 한다고 여기까지 내려 것도 그런데 다시 올라가자고 하려니 미안했다. 그렇다고 거실 바닥에서 세션을 가질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윗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다다른 나는 그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방에는 킹사이즈 침대와 사진으로 뒤덮힌 자그만 목재 옷장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애들 사진이었다. 침대 테이블에는 약상자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밑에는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환자들이 용변을 보는 항아리 같았다. 침실 문에는 커다란 목재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침대에 앉아 숨을 돌린 그는 목발을 손이 닿는 곳에 조심스레 얹여 놓았다. 수줍은 나를 쳐다보는 그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나는 옷을 벗고 그의 옆에 누웠다. 그도 다소 힘들어 보였지만, 다리 모두 침대 위에 올려놓고 누웠다. 아랫쪽에 개여 있는 이불을 잡으려고 몸을 웅크렸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이불 끝을 잡아 올렸다. 


보통 고객한테 질문을 하지 않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궁금해서 가지 물어보기로 했다.


아래층에 계시던 분은 친구분이신가보죠?”


그런 셈이죠.”


놀러 오셨나봐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아뇨, 여기 살아요.”


그런데 마디 주고받다 보니 나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이 그냥 플라토닉한 관계 아니라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남자는 원래 여자와 20년간 결혼생활을 했고, 자식도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장롱에는 자식들의 성장과정을 한눈에 있는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십대 때부터 섹슈얼리티 때문에 고민했다는 그는 40 중반에서야 커밍아웃을 하고 아내와 사이좋게 헤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즘 지나 아랫층 남자를 만나게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12개월만에 결혼했지만, 그로부터 4 중풍에 걸렸다고 한다. 


보통 결혼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아플 때나 성할 때나 함께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4년을 함께 남자가 갑자기 장애인이 된다면 어떤 심정일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봤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다리를 쓰게 된다 해도 나는 계속 곁을 지킬 있을까? 반대로 내가 장애인이 된다면 상대방은 곁에 있어줄까? 만약 떠난다면 사람을 용서해 있을까?


시계를 보니 벌써 집에 온지 45분이나 지났다. 그래서 슬슬 섹스를 시작하기로 했다.  (계속)




- Devon Delacroix

- 옮긴이: 이승훈




What I learned about myself during an encounter with a disabled married client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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