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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6


시리아: 쉽지 않았던 커밍아웃, 그리고 새 가족에게서 얻은 기쁨




아흐메드 대니 라마단 씨는 Xtra지 레바논 특파원으로 격주마다 한 번씩 '천일야화' 칼럼을 기재하고 있습니다. 사진: AHMED DANNY RAMADAN'




완벽한 샤와르마 함께 먹기 



샤와르마는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다. 중동-터키 음식인 샤와르마는 치킨과 소스가 몇 가지만 들어가면 되는 샌드위치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시리아 전통 샤와르마, 케밥 샤와르마, 아라비안 샤와르마 등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아라비안 샤와르마는 얇게 썰어서 피클과 야채, 소스와 함께 나온다. 그 밖에 아랍권 나라에서는 어디든 미묘한 향신료 믹스를 이용해 제각기 완벽한 샤와르마를 만들어 낸다. 


얼마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왜 아랍식 샤와르마를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었다. 그리고는 11 살이었나 12 살이었던 때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200 시리안 파운드 (당시 돈으로 4$)를 쥐어주며 큼지막하고 맛있는 아랍식 샤와르마를 사오라는 사명을 주시곤 했다. 나는 여동생들, 부모님과 함께 식탁을 둘러싸고 아름답게 장식된 샤와르마와 시원한 만다린(시리아판 펩시)을 먹곤 했다. 내겐 가장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이다. 


음식을 보며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는 게 얼마나 진부한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함께 샤와르마를 먹던 기억을 빼고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늘 어두웠다. 왜 17 살 때 아버지에게 커밍아웃했을까? 질풍노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한 것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벽장 밖으로 나온 나는 뭔가에 씌였던 것이 틀림없다.   


용기나 자부심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무지개 깃발을 들고 다마스커스 거리를 행진하며 권리를 요구하는 17 살짜리 내 모습을 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커밍아웃한 진짜 이유는 단순히 아버지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난 정말 아버지에게 있어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존재였으면 했다. 어머니와 우리들로부터 멀어지는 아버지를 보며, 내가 마치 아버지 삶의 한 구석에 잊혀진 의자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교 숙제랑 빨래 때문에 다투던 중이었는데, 그러다가 나는 게이라고 소리질러 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폭풍같은 반응이 이어졌고, 꼬치꼬치 묻는 질문에 나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화산분출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귓사대기가 날라왔고, 주먹이 여러차례 날라왔다. 그러다 발에 차여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제발 그만 하라고 빌었지만, 고함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를 방에 가두고 열쇠를 세 번이나 걸어채운 후에도 고함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10 년이 지난 지금 (8 년 동안 서로 말을 안 했다) 아버지는 요르단의 작은 집에서 난민이 된 가족을 돌보고 있다. 내전의 압박 때문에 시리아의 집과 직장, 삶을 버리고 온 아버지는 새 시작을 꿈꾸고 있다. 전화 통화를 할 때면 아버지는 자신이 겪는 시련, 고통, 그리고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가끔은 돈을 달라고 부탁 또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목소리는 동요된다. 


아버지는 바뀌었을까? 가끔 궁금하다. 아버지는 전쟁이 나서 폭탄이 터지고, 종파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길거리가 피가 물들 때만 장남과 말을 섞으려 했다.


하지만 여동생 결혼식 때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가족의 일부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나는 사위집에 보여주기 싫은 수치거리였다.


가끔 나는 아직도 자물쇠가 세 번이나 잠긴 그 방에 같혀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십대 시절에 영원히 갖혀,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한 채, 소속감을 갈구하고 있다.


가끔은 위로를 찾을 때도 있다. 


얼마전 룸메이트 데이빗이 자기는 늘 형이 갖고 싶었다며, 나를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이집트에 있을 때는, 발코니에 앉아 절친 나디아와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나디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내 여동생이 되어줄 수 있냐고 물었고, 나디아는 웃으며 '엄마만 다른 남매지'라고 말해 줬다. 


몇 달 전에는 나의 캐나다 이민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아주고 있는 분이 응원과 따스한 포옹이 필요했던 나에게 나타났다. 그 분은 가끔 농담 삼아 나를 입양하고 싶다고 하신다. 그렇게 그 분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또한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가족은 태어나면서 엮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내게는 정말 훌륭한 가족이 생겼다. 


이젠 나의 새 가족들을 흥겨운 아랍식 샤와르마 파티에 초대하고 싶다.



- 아흐메드 대니 라마단

- 옮긴이: 이승훈 



Coming out in Syria was difficult but new chosen family brings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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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




다름을 싫어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아랍인 동성애자들



오랜 세월 다른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배워온 아흐메드 대니 라마단 씨는 다른 것은 곧 다양성이자 창조성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진: Ahmed Danny Ramadan




시리아 고등학교 시절의 망령



14 살 때 감정이라는 이름의 선생님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우아티프인는데, 아랍어로 '감정'이란 뜻이다. 우린 그 선생님을 우아시프라고 부르곤 했다. 아랍어로 발음이 거의 비슷한데, '폭풍'이란 뜻이다. 


다혈질이었고, 머릿결은 플라스틱 같은데다 면도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늘 수염으로 덥수룩했다. 그런 우아티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애국이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애국'은 6 살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부분의 학교에서 필수로 지정하고 있는 과목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아트 정권이 이전의 모든 끔찍한 고통을 없앤 천사같은 정권이라는 점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시리아 정치사를 다루는 것이다. 아사드 일가는 부자가 40년이나 나라를 통치하면서도 결점이라곤 없었던 신 같은 존재이고, 홀로코스트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며, 시온주의자들의 개입만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선생님 수업 때면 나는 알라가 동성애자인 나에게 벌을 내릴지, 어떻게 하면 짝사랑하던 반친구를 집으로 불러서 그짓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몰두하곤 했다. 


우아티프 선생님은 우리가 팔레스타인 점령구를 수복하고, 아랍권을 하나의 나라로 엮으며, 불사의 대통령 각하로부터 배운 자유와 사회주의의 개념을 전세계에 전파시킬 꿈나무들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복제인간으로 자라서 가치관과 삶에 대한 한가지 생각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듯 했다. 우아티프 선생님에겐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였다.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고 배울 때마다 난 의문이 들었다. 왜 나만 다른 걸까? 내가 배운 건 간단했다: 다르다는 건 나쁘다는 것. 다르다는 건 이 세상의 고장난 부품이자, 나쁜 정자가 어머니의 난자에 잘못 착상된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정말 나쁜 선택이자,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킬, 후회할 일이라고 배웠다. 

 

지난 10 년 동안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어째서 남들과 다르면 안 되는 건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다르다는 것은 곧 다양성이자 창조성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르다는 것은 곧 아름다운 것이자 독창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문신과 피어싱(아랍권에서는 금기시된다)을 좋아하는 내 성향도 받아들였다. 종교 전반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가족지향적'인 생활방식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랍권 동성애자는 대부분 나처럼 행운아가 아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용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가족들에 짓눌려 있고, 키우기 쉬운 양을 늘리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육중한 손아귀에 갇혀 있다. 다른 것을 배척하고 익숙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다들 자기혐오에 빠져 있다. 


이러한 자기혐오는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큰 변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세계각지의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소외라는 짐을 어느 정도 짊어지고 살아왔다. 


아랍권 동성애자들의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다. 수많은 동성애자들, 특히 시리아의 동성애자들이 비밀생활과 대외용 생활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낙담하고 있다. 서로 헐뜯기도 하고, 술에 빠져 살기도 하며 자기혐오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우아티프 선생님의 망령이 쓰인 채 다마스커스, 베이루트, 카이로, 암만, 바그다드의 거리를 거닐고 있다. 




- 아흐메드 대니 라마단

- 옮긴이: 이승훈



The burden of being gay and Arab in a world that doesn't like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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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4


한 시리아인 동성애자의 비상






내전, 그리고 숨어사는 동성애자들. 대니 라마단은 더 나은 삶을 원한다.




15 살이었던 대니 라마단은 반친구와 단둘이 방에 숨어 몇 시간씩 관계를 가지곤 했다. 그리고 시리아 전체를 통츨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이 세상에 우리 말고도 게이가 있는지 몰랐어요." 스카이프 동영상을 통해 라마단이 말했다. 

 

"우리만의 작은 비밀이었죠. 수치심과 죄악감으로 가득찬 느낌이랄까… 뭐라고 형언하기 힘드네요."

 

라마단의 반친구는 여자와 결혼해 외국으로 갔고, 라마단은 난민자격으로 캐나다에 오길 바라며 레바논에서 숨죽여 지내고 있다.

 

시리아를 떠나 근 십 년을 방랑하며 동성애와 관련된 일은 뭐든지 도전해 온 라마단은 2년전 처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여기저기 뒤져도 보고, 책도 읽어보고 영어도 공부해 봤어요. 그것도 아니면 몇 시간씩 앉아서 뭐가 뭔지 이해하려고 노력도 했구요."

 

2011 2 월 다마스커스로 돌아온 그는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시리아의 이반 공동체는 미국이나 캐나다의 1920년대를 방불케 했어요.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고, 아무도 공동체를 이루려 하지 않더라구요."

 

"다들 자기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사는 것에 충격 받았어요. 어리둥절한 채로, 또는 외면한 채로, 가족이 상대를 찾아 결혼시킬 때까지 그냥 허송세월을 보내는 거죠."

 

라마단은 가족 그리고, 제한적으로나마 직장동료에게 커밍아웃한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반들과 같이 있어도 얼마나 커밍아웃했냐는 질문만 끊임없이 받았다. 

 

"다들, 동성애가 뭔지, 왜 커밍아웃하려 하는지, 제가 왜 그렇게 당당한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숨겨야 하는 일이라는 거죠."

 

마음이 가는 남자를 만나도 너무 개방적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이 거리를 두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굉장히 부정적인 상황이었어요. 다들 저 때문에 수치스런 꼴을 당하게 될 거라고 했고, 제가 '파데이하'를 불러올 거라고 했어요." 파데이하는 아랍어로 스캔들이다.

 

시리아에서는 전통적인 결혼관계를 맺는 동성애자 비율도 높다고 한다.

 

"그냥 그렇게 하도록 훈련된 거예요. 종교도, 사회도, 가족도, 모스크의 셰이크들도, 교회의 목사들도, 선생님, 형도 다 그게 맞는 거라고 하니까요. 남자라면 처가집에 갈 때만 빼고 결코 집을 비워서는 안 된다고들 해요. 여자에게는 그게 수치인 거죠."

 

이러한 끈끈한 가족구조는 공동체의 기반이 되지만, 다른 이들이 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라마단은 시리아에서도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일어나면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레즈비언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많은 차별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나마 20대 후반까지 결혼을 미를 수 있지만, 여자는 20대 중반만 돼도 노처녀라며 멸시받기 일쑤죠."

  

"게다가 시리아의 가정은 명예훼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자를 가둬 두기만 해요."

 

"이상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시키는 대로 살도록 사사건건 간섭(늦지 마라, 그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라, 그 옷 입지 마라 등등)받는 여성들이 먼저 저항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해요."

 

라마단은 시리아 여성들이 강인하고, 특히 레즈비언들은 게이들보다 자신의 권리와 수요가 뭔지 '훨씬 더' 잘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시리아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이 아직 자리잡지 못 했기 때문에, 아마도 레즈비언 운동에 가속도가 붙게 될 겁니다."

 

만약 여성들의 기본교육과 공개적인 의사표현을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이 도입된다면 오히려 큰 수확이 될 수도 있다고 라마단은 지적한다. "그 땐, 페미니즘 운동, LGBT운동, 그 밖에 모든 사회운동과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거예요."

 

***


현재 진행중인 정치계의 혼돈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운동을 전개할 시도마저 무색하게 만든다고 한다.


 

"LGBT들이 단순히 성적 공동체에서 문화적, 사회적 독립체로 성정할 가능성을 모조리 꺾어버리고 있어요."

 

현재 집권 세력은 정적의 평판에 흠집을 내기 위해 상대방을 '로우티'라 부르며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을 조장하고 있다고 한다. 로우티는 아랍어로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속어이다.

 

"TV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그런 소릴 해요. 야당의 누구누구는 로우티기 때문에 혁명에 관심이 없다는 둥, 누구누구는 길바닥에서 동성성교를 하기 위해 혁명을 부르짖는다는 둥..."

 

시리아에서는 동성성교를 하다가 적발되면 징역 3년과 함께 사진과 신분이 공개된다. 국민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리아의 동성애자들은 지난 2년간 전국을 휩쓸고 있는 극심한 폭력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다마스커스에서 라마단이 살던 곳은 미사일 폭격이 일어나는 곳이었고, 집뒤 골목에는 저격수가 진을 치고 있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는 화장실이었다. 라마단과 연인 아메르는 길거리에 쏟아지는 폭격을 뒤로한 채 화장실에 숨어 카드나 주사위게임을 하곤 했다. 

 

라마단은 자신이 2012 월 아메르와 불경한 만남을 가졌기 때문에 다마스커스에 위기가 닥친 거라며 농담했다. 

 

***


라마단은 시리아의 이반생활에 대한 환멸"평범한 삶"에 대한 갈증으로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10년 후에는 다른 나라에서 결혼해서 사는 꿈을 꾸곤 해요. 4~5년 뒤에는 아이도 입양하고, 15년 뒤에는 애 키운 걸 후회하는 그런 평범한 삶 말이예요."

 

현재 라마단과 아메르(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명공개를 꺼렸다)는 레바논에 살고 있고, 라마단은 워싱턴 포스트 베이루트 지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레바논의 이반생활은 시리아보다 "조금 더 진화해 있다"고 한다. 헬렘(Helem)이라는 동성애자 인권단체가 있고, 무엇보다 정보가 많기 때문에 자기인식과 자기수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바논의 이반 공동체들도 폭행과 공개적인 모욕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다.

  

두 달 전 데크와네라는 소도시의 시장이 현지 게이바 습격을 명령했고, 검거된 손님들은 구타를 당하고, 벌거벗은 채로 사진을 찍혔다고 베이루트의 <알악바르>지가 보도한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안트완 샤크투라 시장은 'Ghost'라는 클럽이 매춘, 약물복용,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폐점을 명령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보니 사람들이 서로 키스하고 애무하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한 남자는 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런 동성애 행각은 추악한 성행위입니다."

 

"물론 다들 옷을 벗겼습니다. 이런 추한 광경을 본 이상, 대체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야 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말이죠."

 

한편 헬렘 설립자 차르벨 메이다 씨는 <알악바르>지와의 인터뷰에서 체포된 이들 중에는 "시리아에서 온 사람, 레바논의 트랜스젠더도 있었는데, 그 중 트랜스젠던는 시청에서 옷을 벗도록 강요당했다"고 밝혔다. 

 

경찰이 클럽 Ghost를 정기적으로 습격했기 때문에 헬렘에서도 주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라마단은 현재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레바논을 거점으로 하는 시아파 단체 헤즈볼라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베이루트에서 시리아 난민으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특히 기자라는 신분 때문에 항상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어요.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워싱턴 포스트지에 제 이름이 올라가니까요. 생각하면 무섭죠."

 

게다가 베이루트의 일부 지역에서는 시리아인들을 대상으로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있다. 저녁 7 시에서 아침 5 시 사이에 외출하다가 발각되면, 내전으로 얼룩진 고국으로 송환될 수도 있다. 

 

6 19 일자 뉴욕타임스지 보도에 따르면 레바논은 현재 '공식집계'로만 50만여 명의 시리아인 난민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 중 과반수가 지난 5개월 사이에 피난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레바논 정부는 그 밖에 등록되지 않은 시리아인이 50 만명 가량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


라마단은 3년전 인터넷에서 한 시리아인 동성애자를 알게 되었다. 현재 밴쿠버에 살고 있는 그는 라마단에게 캐나다 이민을 제안했다.

 

"그 친구가 들려준 삶을 저도 누려보고 싶어요. 제 자신을 숨기지 않고, 남자친구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 말이예요."

 

"정말 보금자리라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캐나다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라마단은 아메르와 손잡고 길을 걷고 싶고, 프로포즈도 받고 싶고, '집안의 문이란 문과 창문을 닫지 않고도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한다.

 

"사랑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싫어요."

 

라마단은 캐나다에 있는 친구를 통해, 칼 메도우즈라는 밴쿠버 출신의 간호사를 알게 되었고, 메도우스는 그가 캐나다에 올 수 있도록 청원을 넣겠다고 약속했다. 

 

메도우스는 "어떠한 지위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고 꽤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년전 제이슨 케니 이민국 장관은 캐나다 시민권 이민국이 무지개 난민 위원회(Rainbow Refugee Committee)와 연계하여 동성애자 난민들이 캐나다에 정착할 수 있도록 10만 달러(약 1억 원)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 지원금은 무지개 난민 위원회 및 기타연계단체가 후원하는 난민들에게 3개월 분량의 수익으로 지급되며, 후원 단체는 지원 기간 동안 난민들에게 지향성 서비스, 숙식, 기본적인 가재도구, 및 의류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당 일 년간 약 11,800 달러(약, 1300만 원)가 들어간다.

 

메도우즈는 두 사람이 밴쿠버에 올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지난달 '대니와 아메르의 희망재단(Danny and Aamer Foundation of Hope)'을 설립한 메도우즈 씨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하고, 인터넷모금, 현지모금, 서류준비, 정착 등을 담당하는 팀을 꾸렸다. 

 

"자원은 많아요. 그 자원들을 어떻게 엮어내느냐가 관건이죠."

 

이번 후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정착이라고 메도우즈 씨는 강조했다. 

 

"이곳 이반 공동체들이 희망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두 사람을 밴쿠버로 데려오기까지는 2 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라마단은 모든 게 꿈만 같다고 한다.

 

이민까지 2 년이나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라마단은 두 사람이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다'고 대답했다. "갈 수 있겠죠. 꼭 갈 수 있었으면 해요."


 

대니와 아메르 재단에 기부하실 분들은  vancity.com로. Vancity Savings: Account 162776 Branch 28 Plan 24 Savings


- 나타샤 바소티

- 옮김: 이승훈



A gay Syrian's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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