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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3




베이어드 러스틴: 워싱턴 행진의 핵심에 있었던 흑인 게이 평화주의자



러스틴은 킹 목사의 행진에서 주요전략가로 활동했지만, 일부 주최자들이 그를 골칫거리로 여긴 탓에 뒷전로 물러나야 했다. 이렇듯 1987년에 별세한 그는 시민권 운동에서 종종 잊혀지는 경우가 있다. 




1963 년 뉴욕 본부에서 워싱턴 행진 경로를 설명하고 있는 베이어드 러스틴. 사진: AP



1963 년 7 월초 시민권 운동 지도자들이 할렘 루즈벨트 호텔에 모여 워싱턴 행진을 계획할 때, 이들의 골칫거리는 오직 하나, 베이어드 러스틴이었다. 


시민권 운동의 가공할 만한 조직자이자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복잡하고도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퀘이커계 가정에서 자란 그의 정치활동은 평화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시민권운동 등을 극적으로 거쳐갔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거부한 그는 양심적 병역 기피자로 투옥되었다. 시민권 운동 지도부가 비폭력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을 정책 뿐만 아니라 원칙으로 채택한 것은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바로 몸입니다. 이 몸을 쑤셔넣어서라도 바퀴가 돌아가는 걸 막아야 해요."


그는 커밍아웃 동성애자이기도 했다. 성직자들이 시민권 운동을 지배한 1960년대 초반에는 이 점이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1953년 그는 파사데나에서 두 남성과 차안에서 성교하다가 체포되면서 입지는 더더욱 취약해졌다. 그는 경범죄에 해당하는 '부도덕 혐의'를 호소했고, 6개월간 감옥에 보내졌다. 


그날 법정에 있었던 이들 중에는 이 사건 때문에 러스틴을 워싱턴 행진과 결부시키기엔 곤란하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전미 흑인 지위향상 협회(NAACP)의 로이 윌킨스도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당신이 워싱턴 행진을 이끌면 안 됩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쓰지 않지만, 전 병역기피를 옹호하고 싶진 않습니다. 당신이 퀘이커 교도인 건 압니다. 하지만 제가 옹호해야 하는 건 그게 아니라 병역기피와 난교행위입니다. 문제는 동성애가 아니라 난교행위란 말입니다. 그것만은 옹호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청년 공산 연맹의 회원이기까지 합니다. 당신이 뭐라 하든 소용 없습니다. 전 그런 걸 옹호할 순 없어요."


하지만 윌킨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러스틴은 행진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이끌었고, 윌킨스는 그런 러스틴을 옹호하라는 요구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0년후 백악관은 그에게 미국 최고의 시민상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사후수여했다. 자유훈장 수상은 1987 년에 별세한 러스틴의 여정이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그의 최고업적 즉 워싱턴 행진을 조직한지 50 년이 지난 지금, 삶과 역사로부터 소외되었던 그가 정부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된 것이다. 


<Lost Prophet: The Life and Times of Rustin Bayard>의 저자 존 데밀리오는 워싱턴 행진이 제안된 당시를 이렇게 회술했다. "그가 막 쉰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세간의 주목을 바랬지만, 그 순간이 오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20세기 중반 아직 이름도 없던 또다른 유형의 편견 때문에 그의 기회는 줄어들었고, 효율성도 제한되었습니다."


희끗희끗하고 세로로 선 머리, 가슴팍에 느슨하게 맨 넥타이. 러스틴에게는 항상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워싱턴 행진은 그보다 스무살 연상이자 오랜 멘토였던 필립 랜돌프라는 사람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봄에 버밍엄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전까지 시민권 운동에서 전국대회에 선뜻 참가하려는 이들은 없었다. 

 

1963 년 워싱턴 행진 전국본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베이어드 러스틴. 사진: Eddie Adams/AP


지금이야 워싱턴에서 시위가 일어나는 것이 다반사지만, 당시 러스틴과 랜돌프의 제안은 실로 대담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몇 십만 명의 시위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몰려든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데밀리오 씨는 그로부터 8주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러스틴은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냈습니다. 맨손으로 조직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스탭을 모아서 극심한 압박속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팀을 꾸려내야 했습니다. 단체간의 경쟁, 개인간의 적대감, 상충되는 정치 속에서 연대를 일궈내야 했습니다. 또한, 절제를 권하는 자유주의자들에서 대회를 방해하려는 인종 격리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반대세력의 지뢰밭을 헤치고 나가야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골칫거리 때문에 프로젝트가 평가절하되지 않도록 이 모든 것을 대중들의 눈을 피하면서 해내야 했죠."


이 비범한 노력은 할렘의 웨스트 134번가와 레녹스 거리에 위치한 낡은 옛교회 건물을 본부로 이루어졌다. 본부는 마치 점령된 학생연합과 비상사태에 돌입한 군대본부를 합친 것 같았다. 운송책임자이자 러스틴의 오랜 조수였던 레이첼 호로위츠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신나고 정신없던 시절이었어요. 모든 게 아드레날린과 흥분으로 운영됐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습니다. 비차등적이었고 원초적이었으며 모두가 평등했어요."


이는 러스틴의 기괴하고도 활동적이며 능률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그는 쉴새없이 움직이면서, 대화에 끼어들었고, 동시에 전화를 받으며 스탭들에게 메모를 전해줬으며, 줄담배를 피며 낙서까지 했다. 시민권 운동가였던 제임스 파머 씨는 자서전에서 러스틴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전에도 다른점이 많았지만, 그 뒤로 더 많은 차이점이 생길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조직업무를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행진을 지지하는 연대가 성장하면서, 행진의 성격도 바뀌었고, 그 규모는 커졌지만, 전투적인 요소가 대부분 희석되었다. 러스틴이 새로운 측면을 모조리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자, 젊은 스탭들은 반즈음 농담으로, 반즈음 답답한 심정으로 그를 질타했다. 호로위츠 씨는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우린 모두 '오, 베이어드! 당신은 이 행사를 서커스로 만들고 있어요!'라고 외쳤어요."


언제나 연대 설립자였던 러스틴은 "10만 명, 15만 명, 20만 명이 워싱턴모이면 행진은 성공할 거라는 점을 우린 알아야 합니다. 흑인 역사상 최대규모의 집회가 될 것입니다. 흑인 공동체는 물론 노동계급 및 교회의 백인들이 전대미문의 단결을 보여줄 겁니다"라고 말했다. 행진에는 결국 25만여 명이 모였다.


전체를 조망함은 물론, 화장실 갯수, 샌드위치 종류(마요네즈는 더운 날씨에 상하기 쉽고, 설사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싸오지 말 것을 권고했다) 등 세부사항을 신경쓸 줄 아는 러스틴의 능력 덕분에, 윌킨스가 그를 공격했을 때 랜돌프는 그를 옹호했다. 


1970 년 뉴욕에서. 사진: AP


윌킨스의 태도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가 우려한 바는 당시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가 죽고 얼마후, 파머는 그가 1961년 프리덤 라이더를 심사했던 방법에 대해 알려줬다. "아주 신중하게 심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든 집어던질 거란 걸 알았거든요. 그래서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약물중독자들을 골라냈습니다. 21살 미만은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했어요. 저도 사람들을 면접했고, 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랜돌프가 러스틴을 고집하자, 윌킨스는 항변했다.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문제가 생겨도 전 모릅니다."


문제는 행진이 시작되기 한 달 전에 대두되었다. 인종 격리주의자인 스트롬 서먼드 목사가 상원에서 러스틴을 "병역기피 공산주의자에다가 동성애자"라는 낙인을 찍었고, 러스틴이 샤워중인 킹 목사와 이야기하는 사진을 의회 의사록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서먼드 목사의 공격은 시기적으로도 한발 늦었었다. 또한, 너무 유독한 우물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러스틴의 늘어나는 지지에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심지어 윌킨스의 마음조차 얻지 못했다. 활동가 엘리노어 홈즈 씨는 "시민권 운동엔 동성애혐오자들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스트롬 서먼드가 공격을 가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다들 알고 있었죠"라고 말했다. 


역사는 서먼드 목사보다 러스틴의 편에 섰다. 서먼드 목사가 죽은 후, 그가 인종통합주의를 욕하는 한편 시녀 사이에 흑인딸을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러스틴은 대다수가 동성애자 인권을 지지하는 시대에 집권 2기를 맞는 흑인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게 됐다. 


엘리스 워커 씨는 자신의 수필집 <Zora Neale Hurston: a Cautionary Tale and a Partisan View>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린 국민이다. 우리 국민은 천재들을 내버리지 않는다. 만약, 천재들이 내버려지면, 우리 아이들을 위해 그들을 다시 주워모으는 것이 예술가지아 미래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가지는 의무다. 필요하다면 그 뼛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담아야 하는 것이다."



- 개리 영 

- 옮긴이: 이승훈




Bayard Rustin: the gay black pacifist at the heart of the March on Washington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The Guard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