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2015-07-12



“Your homosexuality killed your mother”

Click here for the original column on iranwire.

 





이란에서 레즈비언으로 살아온 사미라는 모욕과 고립을 견뎌야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길 바란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거의 네 명이었다. 거의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내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즈음 나는 내가 친구 하나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린 늘 함께 잤고, 낮에도 항상 붙어다녔다. 나는 그 친구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그 친구는 다른 동네로 이사가 버렸고, 나는 그 슬픔을 극복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그 친구가 날 떠나가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반친구들에 대한 내 감정도 선명해졌다. 일단 학교에 와서 스카프를 벗으면 다들 긴장을 풀었다. 보통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아이들은 몇 시간이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연한 화장품을 발라보곤 했지만, 난 치장은 커녕 그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마냥 보고만 있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달콤했던 기억은 교실 창문가에 앉아서 반친구들의 머릿결에 바람에 흩날리던 모습을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반친구 하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친구와 조금도 떨어져 있기 싫었고, 그 아이만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나는 그 친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우리 관계가 조금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해버렸다. 사실 나도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어쨌든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날 일은 내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불러왔고, 내 인생은 영영 바뀌어 버렸다. 친구가 곧바로 학교에 일러바친 것이다. 


어머니가 불려왔고, 나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다행히 2주후에 학교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모든 게 변해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병을 얻어 입원하셨고, 아버지 대신 우리 가족을 돌보던 삼촌은 내 소문을 듣고 온갖 제재를 가해 오기 시작했다. 나는 밖에 나가지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한 채 엄격한 감시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학교로 돌아오자, 내겐 무언의 법칙이 끊임없이 적용되었다. 그 법칙이란 나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책상도 혼자서 써야 했고, 조별활동에서도 제외되었다. 어쩌다 다른 애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역겨워!”라는 말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시간은 흘렀고, 이런 일상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6년 동안 내게 학교란 경멸과 고립으로 점철된 고문실이나 다름 없었다. 그나마 집은 나았다. 어머니는 교육을 받았던 덕에 직접 동성애에 대해 알아보셨고, 비록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거나, 내 성적 지향을 받아들인다는 말씀은 않으셨지만 “그건 니 삶”이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은 내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요함을 안겨다 주었다. 실제로 어머니는 날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주셨고,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17살 때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난 원하지 않았지만 삼촌 집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의지할 곳이라곤 그곳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조차 나와 남동생에게 간섭을 일삼았던 삼촌과 함께 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동생은 새 환경에 곧바로 적응했지만, 난 그나마 누리던 조그만 자유마저도 모욕으로 대체되었다. 가족잔치가 있을 땐 나만 제외되었고, 다같이 저녁식사를 할 때도 나는 같이 앉을 수가 없었다. 내가 옆에 앉으면 축복이 사라진다는 거였다. 심지어는 내 동생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고독감 외에도, 22-23살이 되면 강제로 시집을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나를 사로잡았다. 



작별인사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엄마가 죽은 건 내가 동성애자기 때문'이라고 계속 되뇌었다. 그건 내가 이란을 떠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 사랑은 5년간 이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이란을 떠나기가 더욱더 힘들었다. 하지만 22살이 되던 해 나는 고독을 선택했고 이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가 떠난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옷을 한 벌씩 들고 나가 친구집에 모아두었고, 그렇게 작은 짐가방을 꾸린 나는 집과 이란을 영원히 떠났다. 나 혼자서. 배웅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나는 터키로 넘어갔지만, 말도 몰랐고 돈도 없었다. 2년 동안 내가 겪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그 시련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믿기지가 않는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었던 2년도 끝은 있었다. 내가 겪은 일들은 터키의 그 조그만 난민촌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거리를 헤매며 플라스틱 쓰레기를 주워모아 제분기에 넣었다. 그렇게 플라스틱을 새것처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시간당 20리라(8500원) 밖에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 외엔 갈 곳이 없었다. 


내가 터키에 살 때, 여자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결혼소식은 너무나도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친구를 사귀긴 커녕 다른 사람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고, 아무에게도 내 마음을 털어놓지 못 했다. 터키의 조그만 마을에서 외톨이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너같이 더러운 것한테 줄 방은 없어”라며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일은 예사였다. 


하지만 나는 2년 동안 그 모든 고통과 슬픔을 견디며 언젠가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꿈꿨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내 마음을 알아주셨을 것이다.


캐나다에 온지도 어느덧 8개월이 되었다. 지금 나는 행복하고, 여기서 뭘 할지도 확실히 정해 두었다. 앞으로 갈 길이 험난할 것이다. 지금도 내겐 가족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약해진다. 하지만 언젠간 나도 가정을 꾸릴 것이다.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교도 계속 다녀서, 자격이 갖춰졌을 때는 단체에 들어가 LGBT 인권 일을 하고 싶다. “이게 바로 나”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나는 정말 많은 고통을 인내해 왔다. 더이상 그 누구도, 특히 이란인들이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 오랫동안 이 일을 하면서 언젠가는 “전 가족이 잘해 줘서 그런 일은 겪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들어보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이 언젠가는 결실을 맺어서 '엄마가 죽은 건 내가 동성애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정말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 사미라


- 옮긴이: 이승훈




* We appreciate iranwire for allowing us to share the column on our blog.

* 이 칼럼을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iranwire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