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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6



When some people win more civil rights than others, everybody loses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The Guardian.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가치관이 도전을 받게 되면, 본인이 깊이 간직하던 신념과 정체성을 통해 그 도전을 해쳐나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사진: Dibyangshu Sarkar/AFP/Getty Images




정체성의 정치로 인해 새로운 사회적 위계질서가 생겨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이 불평등을 조장하는 건 아닌지 반문해 봐야 할 것이다.



평등을 향해 나아갈 땐 으레 이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가 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인정할 때 남성들은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고, 노예제를 폐지할 때는 흑인계 미국인도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관점이 필요했다.


하지만 가끔은 좋은 의도를 가진 이들조차 새로운 정의(定義)로 인해 자신의 특권을 잃게 되면 갈등을 하곤 한다. 특히 그 특권이 투쟁을 통해 스스로 쟁취한 것일 때는 더더욱. 결혼 평등권이 가부장제의 조장과 강화에 기여한다는 주장에 맞서는 동성애자들이든, 살해당하는 흑인들보다 사자 한 마리를 더 신경 쓴다는 비난에 화를 내는 동물 권리 옹호가들이든,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가치관이 도전을 받게 되면, 본인이 집착하던 신념과 정체성을 통해 그 도전을 헤쳐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얼마전 <The New Inquiry>지에 토니상 수상작 뮤지컬 ‘펀홈’에 대한 글을 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글을 통해 작품내의 성별역할이 좀더 유연했더라면 지금 우리 사회가 확실하게 갈라놓은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좀더 얽히고 섥힐 수 있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섹슈얼리티는 성별이라는 전반적인 체계 속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하면, 트랜스젠더들은 물론, 이분법적인 성별에 순응하지 못하는 이들도 더 널리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사는 <The Toast>라는 사이트에 요약되어 소개되었다. <The Toast>는 일반적으로 지적이고 문명적인 페미니즘 사이트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내 기사에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캣위즐이라는 네티즌은 “펀홈 기사 때문에 다들 기분이 상한 것 같다”며 비판적인 어조의 댓글을 달았다. “사실 고민되네요. 모든 형태의 성별 정체성과 성별표현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궁극적인 의도는 100% 찬성하지만, 필자의 접근방식 대로라면 성욕과 성별정체성을 철저히 별개로 여기고 있는 수많은 이반인들의 정체성과 경험이 무효화되고 말겠죠.”


선량한 의도를 가진 수많은 이반인들은 내가 본인들의 경험이 가지는 타당성에 도전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사회가 들이미는 성별규범과 굳이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 성적지향 때문에 편견을 경험한 적은 있을진 몰라도, 자신의 성별 때문에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내 고국 필리핀에서는 최근까지 그와 반대된 주장, 즉 동성애자는 성별표현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주장을 하면 오히려 맹렬한 반대에 부딛혔었다. 필리핀에서는 동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남성이 제3의 성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성별과 섹슈얼리티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두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선천적으로 우리 몸에 깊이 베어 있을 것만 같은 정체성이 사실은 복합적인 사회적 영향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회에서 성별표현과 섹슈얼리티의 연관성을 인식한다면, 트랜스젠더 및 이분법적인 성별에 부합되지 않는 이들도 지금 동성애자들이 누리는 수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직장 및 교내차별로부터 보호받는 것은 물론이고, 훨씬 더 큰 관용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반인들에게는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젠더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말고를 결정할 특권이 있다. 즉, 그런 고찰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회적 법적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신념과 정체성이 전부 동등한 게 아니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소수자라 해도 다른 소수자들에 비해 내가 상대적으로 누리고 있는 이익을 돌아보고, 설령 자신의 깊은 신념에 반하는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만인의 평등을 향해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얼마전 조금 다른 분야에서 같은 문제점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한 필리핀계 트랜스젠더 여성이 자신은 ‘유색인종 여성’이라고 하자, 내 친구가 그 말에 반대한 것이다. 내 친구의 의견은 이랬다. 그 필리핀계 여성은 자신이 폭력에 노출되기 쉬운 트랜스젠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도로 그런 말을 했겠지만, 사실 상황은 흑인계 트랜스젠더 여성들에게 있어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나는 “유색인종 여성”이 의미상 흑인이 아닌 모든 여성을 가리킨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유색인종 여성”이라는 의미가 어느덧 변화해 버렸고, “흑인여성”의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주 예민한 사안이다. 트랜스젠더를 겨냥한 폭행의 피해자는 대부분 유색인종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흑인계 트랜스젠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행은 극단적으로 많다. 게다가 “흑인 여성”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상황에 “유색인종 여성”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상황은 더 복잡해지고 있다. 



필리핀은 내가 15살 때까지 미국 식민지였고, 나는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열등감을 내재화시키며 자랐다. 그 갈등 때문에, 비록 피부색이 하얀 탓에 백인으로 오해받는 일도 있지만, 유색인종 여성이라고 하는 내 내면의 인종 정체성은 깊고도 강인하다. 하지만 내가 내 자신을 인지하는 것처럼 남들도 나를 인지한다면, 지금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내가 겪는 추행과 폭행 위협은 아마 더 심해졌을 것이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가지 알게 된 것은 내가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들과 같은 수위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상황에서 내 자신을 유색인종 트랜스젠더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겪어보지도 않은 입장에서 말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이들이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려 할 때 그 노력을 폄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구분을 짓기 위해 나는 내 정체성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는 내 정체성에 대한 도전과 대면하기로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박해받는 이들을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즉, (고의든 아니든) 내가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절실한 입장에 설 수 있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그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로 인해 일부만 권리를 쟁취하고 나머지는 패배하는 식의 새로운 사회적 위계질서가 생겨나서는 안 될 것이다. 소외계층의 권리 투쟁에 동참할지 여부를 고려할 때 가장 큰 시련은 그 사안이 특정 부류의 사회적, 물질적 이익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는지, 내가 그토록 지켜왔던 신념이 불평등을 조장하는 건 아닌지 반문하는 것이다. 이런 반문을 거부하는 것은 흑인과 백인간의 문제처럼 극명한 불평등을 부정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더 공정한 세상을 위해 애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은 중요하다. 설령 그것이 내가 지켜온 정체성과 신념에 반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 Meredith Talusan


- 옮긴이: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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