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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2




미국 부통령이 뻔한 흑인 게이 남성




동성애자 민간인, 군인,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옹호한 부저 




삽화: Alexander Barattin/Daily Xtra



여러분은 흑인 퀴어 남성이 대통령이 뻔한 미국사를 상상할 있겠는가.


1980 민주당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를 뽑기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멜빈 부저(Melvin Boozer) 후보 명으로 공천되었다. 미국 사회당의 지지와 87명으로 구성된 레즈비언 게이 간부회의의 지원을 받은 부저는 부통령 당후보로 공천된 커밍아웃 동성애자였다. 


전당대회에서 부저는 여성, 흑인계 미국인, 동성애자 만인의 평등을 위한 민주당의 노력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은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어떻게 동성애자 인권투쟁을 시민권 투쟁에 비유할 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는 가능하며, 실제로 저는 둘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고 있습다. 깜둥이로 불리는 것도, 호모라 불리는 또한 어떤 심정인지 알고 있습니다. 둘의 차이점을 물으신다면 아무 차이도 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편견은 편견일 뿐입니다. 저는 야유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차별은 차별일 뿐입니다. 결국 받는 상처도, 우리 삶에 대한 모욕도 같은 것이며, 이는 이해와 공정성, 자애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커밍아웃 동성애자로서는 최초로 부통령 당후보로 선정되는 것도 미국 동성애사에 있어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멜빈부저 박사의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가 제임스 토머스 시어스의 저서 Rebels, Rubyfruit, and Rhinestones: Queering Space in the Stonewall Soutt (반란, 음경 그리고 라인석: 남부 스톤월의 퀴어화 공간) 따르면 부저는 워싱턴 DC에서 자랐다고 한다. 가족이 경영하던 흑인 시온감리교회에서 안내담당을, 학생 교련단에서는 연대장을 맡았고, 로렌스 던바 고등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1963 뉴햄프셔주 다트머스 컬리지에 입학한 명의 흑인 학생 명이었으며, 장학금을 받기까지 했. (다트머스의 교훈은 Vox clamantis in deserto , ‘야생에서 울부짖는 목소리, 부저의 삶과 묘하게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시어스는 부저가 버밍햄 버스 보이콧(흑인들이 대중교통의 인종분리 정책에 맞서 일으킨 시위) 그리고 워싱턴 대행진과 같은 해에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부저는 성인이 때까지 자신의 성적지향을 밝히지 않았다. 시어스에 따르면 부저는자신이 어릴 때부터 남자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흑인인데다가 남자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성과 연애를 하지 않아도 의심 받지 않을 있는 환경이었다고 한다. 예일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매릴랜드 대학교 사회학과의 교수로 취임한다.


부저가 활동주의에 눈을 것도 시기였다. 1979 그는 동성애 활동가 연맹(Gay Activists Alliance)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 임기를 두 번에 걸쳐 연임하게 된다. 동성애 활동가 연맹은 비영리 단체로서, 워싱턴 DC 기반으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옹호했다. ( 단체는 지금도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 연맹(Gay and Lesbian Activists Alliance)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당시 부저는 워싱턴 수도권 지역 대중교통국과의 소송을 승리로 이끌어 시내버스에당신의 주변에도 동성애자가 있습니다라는 포스터를 내걸기에 이른다.


시어스의 저서에는 부저의 다른 업적도 소개되어 있는데, 미육군과의 소송에서 승리를 거두어 동성애 활동가 연맹도 알링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묘에게이, 레즈비언 용사라는 이름으로 화환을 올릴 있도록 했다. 밖에도 경찰폭행에 맞서 시민에게 힘을 실어주는 한편, 워싱턴 DC 경찰학교에 동성애 주제가 정규교과 내용으로 포함되도록 하는 , 정치적 성과도 상당수 남겼다. 또한 동성애 활동가 연맹 회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내는 , 국립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동성애자 희생자들을 포함시키기 위한 노력에도 참여했으며, 최초의 흑인계 동성애자 기간지 BlackLight에도 정기적으로 투고했다.


1980 8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카터가 재선 후보로, 부저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월터 먼데일에 맞서 부통령 후보로 공천되었다. 공천에는 77명으로 구성된 레즈비언 게이 간부회의의 회원들이 청원서를 돌리고 의원 400 명의 서명을 받아낸 것이 크게 작용했다.


바디 폴리틱(핑크 트라이앵글 출판사에서 출간한 Daily Xtra지의 전신) 1980 10월호에는 호명투표가 도중에 중단되었는데, 시점에서 부저는 49표를 얻은 반면, 먼데일이 대부분의 표를 얻었다고 되어 있다. “부저는 전당대회에서 동성애자 사안에 대해 연설할 기회를 얻기 위해 후보에서 사퇴했고, 그는 그렇게 해서 열성적인 연설을 통해 동성애자들이 일궈낸 성과를 치하하게 된다. 


수많은 남녀가 어째서 임의적인 차별로 고통받아야 합니까? 우리도 미국인들의 삶에 남들과 똑같이 공헌해 왔는데 어째서 우리만 공정한 기회를 거부당해야 하는 겁니까? 헌법에는 모든 시민이 법앞에 동등한 보호를 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어째서 우리만 추행과 위협, 조소에 시달려야 합니까?”


바디 폴리틱에는수많은 의원이 부저의 선언에 공명했지만, 연설이 끝난 뒤에는 야유의 목소리도 일부 들렸다 나와 있다. 


재선에 실패한 카터와 먼데일은 각각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레이건은 AIDS 사태를 묵인한 일로 대대적인 비난을 받았고, 그의 홍보부장을 맡았던 패트 부캐넌은 에이즈가자연이 게이들에게 가하는 복수라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 1987 두번째 임기 완료를 앞두고 있던 레이건은 3 국제 에이즈 컨퍼런스에서 비로소 사태를 다루게 되는데, 이미 36,058 명의 미국인이 에이즈 진단을 받고,  20,849 명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였다.


부저 자신도 에이즈 합병증으로 인해 41세의 나이로 요절하지만, 그는 죽기 7년에 걸쳐 옹호활동과 지적연구에 매진했다. 에이즈 추모 퀼트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의 이름이 핑크 트라이앵글 상단에 올라 있는 홀로코스트의 동성애자 희생양들을 인정받기 위한 그의 노력을 치하하기 위한 것이라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기억할 이유는 뿐만이 아니다. 멜빈 부저는 정치계의 강력한 선구자임과 동시에, 커밍아웃 동성애자로는 최초로 부통령 당후보였고, 대통령이 뻔한 흑인 퀴어이기도 했다.




- Michael Lyons

- 옮긴이: 이승훈




The black, gay man who could have been the US vice-president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Daily X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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