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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0




피터 애크로이드가 들려주는 게이 런던 2천년의 비사 




왕성한 활동으로 유명한 전기 작가 역사가 소설가 애크로이드가 그에게 가장 친숙한 도시의 동성애사로 다시 돌아왔다.





피터 애크로이드, ‘그냥 별 생각이 없는 거죠.’ 사진: Graeme Robertson for the Guardian



피터 애크로이드는 런던 중심부 나이츠브리지의 아파트를 찾은 필자를 서재로 데리고 들어갔다. 책과 인쇄물이 빽히 들어찬 그곳은 비좁고 다소 단조로운 공간이었다. 창문에도 건물 뒷면이 우울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느덧 60 후반에 접어든 애크로이드는 스타하노프적인 취향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책장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지만, 그건 책이 하나같이 두께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1990년에 발표한 디킨스 전기집 특히 어마어마한데 1,195페이지나 된다.) 필자가 계산해 바로는 지금까지 18편의 픽션과 30편의 전기집과 역사물이 있다. 전설적인 음주 이야기를 봐도 있듯, 애크로이드는 무슨 작업이든 대강대강 하는 법이 없다. 


학계에서는 이를 갈겠지만, 찰리 채플린, 에드가 앨런 , 터너의 수채화 기법, 영국스러움의 기원, 베네치아 역사 등의 주제를 잔잔한 필치로 다뤄온 그는 전문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그가 태어났고 생의 대부분을 보낸 , 바로 런던이다. 런던은 그의 작품 전반에 존재가 묻어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런던에 대한 집착은 너무 심오한 것이어서 본인도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해 했다. “뭐랄까. 런던은 항상 피난처였습니다.” 지정학적 피난처라는 뜻인지 개인적인 피난처라는 뜻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다일 것이다.


런던의 동성애사를 다룬 그의 신작 퀴어 시티 그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영역을 다룬 작품으로, 작품이 이제야 나왔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사실 엄연히 말하면 전에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적은 있다. 1979 ‘Ackroyd P’라는 필명으로 그의 첫작품은 세상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의복도착과 드래그를 다루었다. 한편 오스카 와일드의 픽션을 일기 형식으로 다룬 1983년도 작품은 다소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의 서재에는 지금도 토머스 모어와 엘리자베스 시대의 동방박사 디의 초상화 사이에 오스카 와일드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켈트 시대의 런던에서 기독교가 도래한 서기 300년대, (오스카 와일드를 비롯한) 19세기의 초대형 섹스 스캔들들, 그리고 현대의 동성애자 인권투쟁에 이르기까지 훨씬 심오하다. 여느때처럼 이번 신작도 과격할 정도로 수용적이고 라블레적인 특성이 돋보인다. 머리를 현란하게 기르고 콧수염을 기른 켈트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소위사나이들간의 열정적인 우정 높이 샀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율리우스 시저의 말을 인용하는가 하면, 곧바로아직도 런던 시내를 활보하는 그들을 있다 풍자적인 문장을 던지기도 한다.


유행이란 바뀌는 법이지만 애크로이드에게 있어 역사란 계속해서 반복되는 괴기스런 대상이다. 켈트족이 지금의 기준으로 다소 캠프[각주:1]했다면 (애크로이드는 용어가 1800년대 중반 게이들의 은어 폴라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면죄부 관리인도 그렇다고 있다. (애크로이드는 그가 전형적인런던 이반이라고 한다.) ‘몰리하우스 모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18세기 런던의 클럽 매춘굴이었던 몰리하우스는 멋을 게이들이 서로 어울리며 섹스를 즐기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다른 동성애 문화 연대기와는 달리 애크로이드는 레즈비언 문화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조지 5 시절의 딜도 가게(레스터 광장의 가게는 오직 딜도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했다고 한다) 케이브 오브 하모니, 오렌지 트리 에드워드 8 시절 시가릴로 연기가 자욱했던 비밀클럽을 소개하는 구절은 정말 유쾌하다. 



"인구대비로 본다면 18세기 런던에도 게이바가 지금만큼 많았죠."



동성애가 일부 합법화된지 50년이 지난 지금, 동성애 문화보다 변동을 겪은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애크로이드는 사실 그렇게 많은 것이 바뀐 아니라고 한다. 


표현방식은 바뀌지만 정수는 그대롭니다. 지금도 여전히 드래그 바가 있고, 의복도착 행위도 찾아볼 있죠. 공원 같은 곳에 가면 만남의 장소도 있고, 남성전용 클럽도 있어요. 인구대비로 본다면 18세기 런던에도 게이바가 지금만큼 많았죠.”


이러한 현실은 도시의 구조에 영향을 미쳤을 아니라 가끔은 은밀하게 가끔은 다소 대범하게 시민들의 삶을 지배하기도 했다. “젠더플루이드라는 용어가 2016에야 옥스포드 영어사전 올랐지만, 애크로이드가 샅샅히 훑어본 사례 중에서도 14세기의 매춘부 라이크너의 경우를 보면 런던 사람들은 예전부터 사전편찬인들의 얼굴을 붉힐 행동을 왔었다고 한다. 


라이크너는 일리노어라는 이름을 쓰며 여장을 하고 다녔습니다. 어떨 때는 남자로서 남자 손님을 받았고, 여자로서 남자 손님을 받는가 하면 여자로서 여자 손님을 받기도 했죠.” 애크로이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역할들을 너무 자연스럽게 소화해낸 나머지 아무도 그런 그를 대범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애크로이드의 작품은 괄목할만한 솔직함이 특색이지만, 자기 자신을 이야기틀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그냥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다며(그는아무 생각이 없어요라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글로 옮기는 거부반응이 있다고 한다. 


1950년대 이스트 액튼의 공영주택 단지에서 자란 애크로이드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애크로이드가 어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후일 아버지를 찾지만 왕래한 기간은 길지 않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오드리의 신심이 그의 성장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애크로이드는 독자였다. 나간 아버지가 언급되는 일이 없었듯이,  섹슈얼리티 또한 결코 입에 담을 없는 주제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불과 세상을 떠났는데, 애크로이드는 어머니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결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만년에도 그랬을까? 애크로이드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 사람은 가까웠을까? “딱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캠브리지를 다닌 애크로이드는 예일대에서도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원 과정을 다녔다. 그리고 24세가 되던 해부터 <스펙테이터>지에서 문학편집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은 타자기로 찍은 시집 ‘Ouch’(1971)이었는데, 진솔한 내용이 감탄을 자아낸다. 

시인은 서커스보이를 입으로 줬다

그의 가치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으니…”


그런데 1987 “The Diversions of Purley”라는 시집을 애크로이드는 이미 명성을 얻은 상태였고, 과거의 대범함이 사라진 그는 시집에 나오는 모두그녀 바꿔버렸다. “가족들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때만 해도 다들 살아 있었으니까요. 가족들이 이런쪽으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너무 과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겁장이가 되는 길을 택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도 되지만, 어쩔 없죠.”


시집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뮤즈가 떠나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게 끝이었죠.”


당시 그는 예일에서 만난 브라이언 이라는 무용수와 만나고 있었다. 사람은 1994 쿤이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했다. (애크로이드는 뒤로 연애를 했지만 지금은 독신이다.) 때의 경험은퀴어 시티에서 에이즈 도래와 납득할 없는 입원조치 그리고 사망을 다룬 파워풀한 묘사에도 녹아 있다. “현실은 도저히 감당하기에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증상이란 발열, 떨림, 오한, 식은땀, 시력저하, 심한 설사, 일반적인 무기력증 등등이었다. 처방이라곤 진통제, 자가주사, 효능을 없지만 끊임없이 먹어야 하는 알약, 튜브, 주사가 고작이었다. 병원에 간다는 자체가 모욕적인 경험이었지만, 때는 병동에 누워 있으면 침대에서 젊은이가 웅크리고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번도 일어나지 않은 걸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전두엽 수술이라도 받고 나면 속에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구절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비통하기도 했지만 평소의 애크로이드답지 않게 자서전적인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부분을 넣을지 말지 고민했을까?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가능한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고 산뜻하게 표현하려 했다 한다. “저는 서술에 작가 자신이 들어간 책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 저속하죠.”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번도 일어나지 않은 걸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전두엽 수술이라도 받고 나면 속에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지만.”


사실 지난 20년간 그의 작업은 다채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구조수(요즘은 명이다) 정기 간행물과 자료집을 훑어보고 상자와 파일집에 정리하면, 애크로이드가 그걸 보며 메모를 하고, 토픽 별로 묵직한 더미로 정리하는 전부다. 계속과 우연에 대한 그의 심리지리학적 관심은 성격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지만, 이러한 작업방식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자료들을 모으다 보면,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연결고리와 패턴이 보이곤 합니다.”


팩트를 향한 그의 무미건조한 열정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요즘은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때는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한 적도 있었다. 하루를 깔끔하게 등분해서 역사서와 전기집, 소설을 집필하는 것이다. ‘퀴어 시티 마친 지금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작업은 6부작으로 영국사 마지막 권을 완성하는 일이다. 보통인간이라면 당해내기 어려운 분량이지만 애크로이드의 기준으로 보면 웃어넘길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작업이라고 한다.


필자는 다소 놀랐다. 정말 그것 외에는 미완성 작업이 전혀 없냐고 묻자, 그는 무뚝뚝한 말투로 원래는 소설을 계획이었지만 포기했다고 한다. “중간에 막혀버려서 지치더라구요. 언젠가 천사가 나머지 스토리를 속사여주길 바래야죠.”


전에는 글길이 막힌 적이 번도 없었다는 걸까? “ 쓰는 멈춰야 하는 상황은 번도 없었습니다.”


요즘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기력에 조금 신경을 쓰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블룸스베리에 있던 아파트도 팔아버렸고, 근처에 있는 다른 집도 팔아버렸다고 한다. (“ 고생을 하면서 굳이 갖고 있을 필욘 없더라구요.”) 다리를 다친 후로는 걷는 예전같지 않다. 지금도 외출은 하지만 쉽지는 않다고 한다. 런던의 정령들을 깨우며 거리를 누비고 다니던 날은 이제 지나갔다. 지금도 약주를 하지만 저녁에만 마시고 양도 줄었다. (그는 애써 웃으며 의사가 시킨 아니라 그냥 자기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지금도 저녁은 밖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지만, TV 앞에 앉아 있는 날도 늘었다. “그냥 아무거나 보는 거죠. 정말 아무거나.”


작가가 아닌 삶을 상상할 있는지 물어 보며, 예전처럼차라리 팔을 잘라버리겠다 답을 기대했지만 그는 망설였다. “ 지금도 그런 심정이지만 사실 모르겠어요. 그냥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일을 후엔 멈추는 시점이 있는 같아요.” 약간 성가신 듯한 말투였다. “하던 관두는 사람도 많잖아요.”


필자는 그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며 가벼운 글이나 읽으며 지내는 그를 상상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의 말투는 다시 강경해졌다. “ 그렇게 살란 법은 없잖아요. 같으면 뭐든 그냥 해치우고 말죠.”




- Andrew Dickson

- 옮긴이: 이승훈




Peter Ackroyd: A secret history – 2,000 years of gay life in London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the Guardian.




  1. camp: 문학, 예술, 패션 등의 분야에서 그 악취미로 인해 오히려 일종의 매력을 띄게 되는 미학. 게이 남성의 여성스런 행동거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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