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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했던 이반 70년

아시아/중국 2012. 10. 24. 07:28 Posted by mitr

2011-10-27




파란만장했던 이반 70년




서문: 파리 할아버지에 관한 칼럼은 인터뷰에서 발표까지 반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2011 대미언 장후이를 통해  73세의 이반 노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건국 1 대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졸업식은 펑전 베이징 시장이 인민대회당에서직접 거행했었습니다.  졸업후 좋은 직장을 얻었지만 파란만장했던 중국 현대사 60년에서 그는 번이나 투옥되었습니다. 원인은 그가 동성애자, 특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행복을 추구했던 동성애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올해로 73세인 파리 할아버지는 베이징 시단의 옛가옥에서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고 함께하는 파트너가 있는 지금 그는 어느때보다 행복하다고 합니다



  

자택에서. 사진: 懒人



파리 할아버지의 연보


1939  1 14 베이징 출생
1956~1960 사범대학 재학시절, 사랑과 만남
1964~1966 번째 사랑
1976 가족의 뜻에 못이겨 결혼,  년만에 이혼
1977~1980 부랑죄(동성행위) 첫 번째 투옥
1982~1984 부랑죄(동성행위) 두 번째 투옥
1984~1986 부랑죄(동성행위) 세 번째 투옥
1996 수양아들 베이징으로 이사옴
2004 수양아들 결혼식, 전재산 팔아 결혼자금 마련
2006 현재 파트너와 만남
2011 현재 연애 6년차


베이징에는 파리 할아버지라는 분이 있다. 혹자는 그가 프랑스인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는 평생 중국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베이징에서 나고 자란 베이징 토박이이다. 그는 전쟁을 겪으며  격변과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이반이다.  옛날 이국에 대한 동경으로 이반 친구들이 '파리'라는 글자를 그에게 선사했고, 때부터 이름은 그와 함께 50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60년대, 그 풋풋한 20대였다. 그는 당시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성적도 우수했고 집안배경 좋았다(3 대가 중하층 농민계급그는 사범대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고, 국가에서도 이러한 지식분자를 매우 중시 여겼다그가 졸업하던  우언라이 주석과 펑전 북경시장이 직접 학교를 찾아와 졸업생들과 대면했을 정도였다. 파리 할아버지는 대학 졸업후 북경의  명문학교에 교사로 취직하게 되었다문화혁명 전부터 대한 소문이 돌았지만 별  없이 지냈고 한다. 그 같은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거나, 겉으로나마 이성애자의 삶을 살면 무난한 일생을 보낼 있었다. 하지만 무서울 것이 없던  성격과 고집 때문에 파리 할아버지 좌절과 고난을 겪어야 했다.


  


흘러간 옛시절. 사진제공: 파리 할아버지



이것은 파리 할아버지의 성장과정을 담은 사진들이다. 마직막 사진을 봤을 나는 조금 조심스레 물었다. "步入晩年[각주:1]라는 글자를 쓰실 심경이 어땠나요?" 그는 한숨을 쉬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마도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이렇게 감상에 젖게 만드는 질문을 자신을 자책했다.


삼기삼락(三起三落) 인생



70년대의 문화혁명은 사람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기존의 모든 도덕적 가치관도 '계급투쟁을 요강으로 삼는다' 원칙하에 놓이게 되었다. 동성애 현상도 부르주아계급의 부패한 문화라는 비판을 받았고, 자칫 들키기라도 하면 '토끼', '불량배'라는 호칭을 달고 비난과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파리 할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고발을 당했지만 물증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투옥됐을 그를 밀고했던 건 다름아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반 지인이었. 3년의 형기는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 주었다. 투옥될 당시 그 한창 열심히 일을 하던 때였다. 혈기왕성한 젊은 교사였을 아니라 공산주의 청년단 지부의 조직위원이었고 고등학교에서 담임을 기도 했다. 하지만 출소한 후로는 교내 환경미화원이 되어 타인 간섭과 지시를 받아야만 했다

고통과 시련의 시기였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회가 자신의 타고난 신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1982 그는 또다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투옥된다. 하지만 2년의 형을 살고 출소한지 1개월이 되지도 않아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혹자는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여러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시련일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나는 파리 할아버지에게 사회로부터 받은 탄압과 질책은 평범한 사람이 이겨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용기와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물었. 파리 할아버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감옥을 들어가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적이 없어. 도적질을 한 것도 아니고, 강도짓을 적도 없는데 시인할 잘못도 없는게지." 

동베이에서 출소하여 베이징으로 돌아온 파리 할아버지는 일자리도 없었고, 수입도 없었다. 그는 어쩔 없이 징산공원 입구에서 지도를 팔기 시작했다. "그 때는 공원입구에서 지도를 팔지 못하게 했어. 단속이 엄했지. 지금도 생생해. 5위안에 지도 장을 샀는데, 그 세 장을 팔기도 전에 단속반에 붙잡힌 거야. 지도를 몰수해 간다길래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지. 제발 길을 달라고."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파리 할아버지는 목이 막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시절의 고통과 존엄성을 짓밟히며 살아야 했던 당시의 삶을 상상할  없다. 그런 삶 년간 이어졌고,  동안 파리 할아버지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살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 그가 돈을 벌려고  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함도 있었지만 멀리 지린 있는 수양아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당시 8 밖에 되었던 수양아들은 암흑기 유일한 빛이었다. 비록 밖에 만나 적이 없었지만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파리 할아버지는 자신의 책임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았다.

 

어머니와 함께. 사진 속 어머니가 무척 젊어보인다. 사진제공: 파리 할아버지



사랑의 고통과 행복


누구든 일생에서 제일 잊을 없는 일을 고르라면 사랑을 들 것이다.

파리 할아버지는 잊을 없는 사랑이  있었다고 한다.


첫사랑은 대학교 때였. 문학부의  멋진 남학생 좋아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건물의 위아래층에 살게 되었다. 멋진 남학생과 가까워지고 싶어 애를 태우던 파리 할아버지 말을  아이디어 생각해 냈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직전에 화장실에 갔고, 일어날 때마다 일부러 아래층에 들리도록 침대를 흔들었다. 그렇게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남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곤 했다. 감정은 4 동안 이어졌지만, 졸업과 함께 감정은 옅어졌. 세월이 흘러 환갑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 해후한 두 사람은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에 젖었다고 한다

번째 사랑은 시내버스에서 마주쳤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109 버스 안에서 만나게 것이다. 당시 파리 할아버지는 27살, 상대방은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19살 청년이었. 그냥 서로에게 이끌린 것인지, 하늘이 내려주신 인연이었는지,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침 버스가 베이하이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은 베이하이 공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2주일에 밖에 휴일이 없었다.

파리 할아버지는 2주일을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보냈다. 사랑에 빠지면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법이다.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날 잊어버릴 거 같더라고. 별생각 없이 한 약속이었을 수도 있고. 그래도  기억해 주길 바랐지. 베이하이 공원에  친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봤을   흥분은 말로 다 못해."

첫만남 후에 파리 할아버지는 자신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머지않아  사람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파리 할아버지 친구를 집에 데려와 어머니에게도 소개시켜 드렸다. 어머니는 "얘는 인중이 이렇게 짧니. 명이 짧을 같아 걱정이다"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때만 해도 어머니의 마디가 현실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가 지난후 병이 연인을 영영 갈라놓게 된다. 때의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파리 할아버지는 그가 떠난 날이 4월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파리 할아버지는 지금 파트너와 6년째 만나고 있다. 파리 할아버지는 73살이고 파트너는 37살이다. 6년전 사람이 공원에서 처음 만난 풍경을 떠올리는 파리 할아버지의 얼굴은 장미빛으로 물들었. 사람은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다고 한다. 첫눈에 반한 셈이다. 파리 할아버지는 지갑에 항상 파트너의 사진을 넣고 다닌다. 사진을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훤칠한 인물의 훈남이었다.

파리 할아버지에게는 매력이 있다.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말재능,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 등등, 그와 함께 분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끌리게 된다.   사람은 3개월 가량 만나다가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 6년을 같이 있다보면 위기도 닥치고 다투는 날도 있. 하지만 삶의 조예가 깊은 리 할아버지는 어리광 많은 애인을 달래는 법도  알았고, 그렇게 매번 위기를 넘겼. 휴일에는 파리 할아버지가 장을 오고, 파트너가 요리를 한다. 가끔 사이가 어긋날 때도 있지만, 결국 사람은 서로에 대한 걱정을 놓을 수가 없다. '執子之手, 與子偕老[각주:2]'라는 옛말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발렌타인데이는 젊은 사람들만 즐기는 것이 아니다. 발렌타인데이 때 선물받은 비단꽃. 사진: 懒人



선량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


수양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파리 할아버지의 고운 마음씨를 언급하지 않을 없다. 그에게는 아직도 옛 베이징사람 특유의 따뜻한 마음씨가 있다.

1986 그가 출소하기 전날, 부정을 저질러 감옥에 들어온 어떤 사람과 가까워졌다. 집안은 풍지박산이 났고, 부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어린 11녀를 남겨둔 목숨을 끊고 말았다고 한다. 남겨진 아이들은 이제 겨우 8, 10살이었다.

"친척이 애들을 데리고 아버지 면회를 오는데, 남자애가 눈도 깊이 패이고 귀여워. 다들 애를 '러시아 꼬맹이'라고 불렀는데,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애가 너무 가엽더라고. 그래서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했지. 난 어짜피 다시 결혼할 일은 없을 테, 아이를 수양아들로 삼고 싶다고 말이야. 친구도 흥쾌히 승낙하더군." 이렇게 해서 파리 할아버지는 1986 출소했을 때부터 지린에 있는 아들에게 책값과 식비 100위안을 매달 보냈다.


80년대 100위안은 꽤  금액이었다. 특히나 이제 막 출소해서 변변한 직장도 없이 공원 입구에서 지도를 팔며 생계를 이어가던 파리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그는  소임을 년간 묵묵히 지켜냈다.


수양아들과 함께

  


10 수양아들이 베이징으로 올라와 함께 살게 되었다. 파리 할아버지는 그를 친자식처럼 여겨 학원에도 보내고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줬다. 아들이 바깥에서 업신여김을 당할 때면 친아버치처럼 나서서 기술을 익히게 하고 앞날을 설계하도록 도와줬다. 그런 아들이 결혼할 때는 자신이 결혼했을 남겨둔 예물을 팔아 돈  위안을 마련했. 그런데도 아들 부부 살갑게 '아버지'하고 불러주면 그런 고생도 녹아없어진다고 한다.

앞날의 계획에 대해 묻자 파리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이 편안한 만년을 바라잖아. 내 바라는 건 별 거 없어. 내 베푼 모든 선행을 편안한 여생 바꾸고 싶어." 


자택에서. 사진: 懒人


파리 할아버지는 내년 초에 73살이 된다. 가슴 따뜻하고 귀여운 구석까지 있는 이 이반 할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70평생 중에서 어떨 가장 행복하고 기쁘셨나요?" 


그의 대답은 '지금'이었다.

그의 대답이 낭만으로 가득 찼던 젊은 시절이 아닌 것이 의외였다. 나는 처음 파리 할아버지의 집을 들어왔을 때 받았던 인상 떠올렸다. 파리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된 집에서 산다. 아주 작은 집인데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나는 냄새가 집의 벽에서 묻어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냄새는 잡다한 쓰허위안에서 흘러나와 구식 석탄난로 속에 숨어 있다가 부엌의 부뚜막에서 피어난다. 어릴 냄새가 싫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난의 냄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파트너로부터 받았다는 발렌타인데이 선물, 수양아들 이야기를 때마다 활짝 피는 그의 얼굴, 그가 겪었던 온갖 시련, 나는 잘못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그의 표정 떠올렸을 나는   뜻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나는 떠나기  파리 할아버지의 모습이 부러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젊은 이반들이 일흔 되어도 어르신처럼 건강할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요." 말은 진심으로 부러움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친구가 나이가 들면 부모님도 계시고, 애인도 , 살기도 힘들테니 자살하는 낫겠다고 비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나 생명이 있다면 파리 할아버니처럼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 무엇이든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베이징 자택 문밖에서. 사진: 懒人







- 인터뷰: 小川,凌绝顶,懒人
- 편집: 小川,懒人
- 촬영: 懒人

- 옮긴이: 이승훈




老巴黎:风雨同志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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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년에 접어들다 [본문으로]
  2.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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