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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토론토 중동계 LGBT 댄스파티의 설립자를 만나다



정처없던 십대 시절에서 성공회 목사가 되어 아라비안 나이트 LGBTQ를 창립하기까지 켈롤로스 살렙은 자신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아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한다.



Arabian Knights LGBTQ의 창립자 케롤로스 살렙(Kerolos Saleib). 사진: Courtesy Mitchel Raphael



16 교회 목사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케롤로스 살렙은 그때만 해도 일이 계기가 되어 노숙자로 전락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 


살렙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살렙은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서 캐나다로 이주해 몬트리올과 벌링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십대  가족은 미시소가로 이사했는데 그곳 주일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친구들의 괴롭힘으로부터 피난처가 되어준 교회가 그것을 간증으로 여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함께 다니던 콥트 정교회 예배당은 안식처와도 같았고 살렙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  


고해성사 커밍아웃한 살렙은 목사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자신이 잘못된 아니라고 안심시켜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목사는 신앙심 깊었던 살렙에게 이상 교회 행사나 예배에 나오지 말라며 부모님께도 사실을 알리라고 했지만, 부모님의 반응이 두려웠던 살렙은 주저했다. 결국 살렙이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을 틈을 이용해 목사가 집에 찾아와 부모님께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렸고,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모님은 목사의 조언을 따랐다. 


초등학교, 중학교 줄곧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평생을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온 저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집과 교회였는데, 그곳에서마저 거부당하고 사랑받지 못하게 겁니다. 제가 누군지 더이상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 자해행위로 치닫게 됐죠.”

 

살렙이 집에서 쫓겨난 고등학교를 조기졸업하고 뉴욕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기숙사로 들어간 그는 학위를 취득한 후에 The Walrus라는 잡지사의 홍보부에서 근무하다가 2008년에는 캘거리에 본사를 회사가 몬트리올에 홍보 담당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살렙은 몬트리올에서 지내는 동안 서킷 파티나 변조약물을 통해 현지 게이문화를 접하게 된다. 매주 케타민이나 코카인 같은 약물을 사기 위해 수백 달러의 돈을 썼고, 그렇게 약물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눠주곤 했다. 


도피하고 싶었던 거죠. 종교와 관련된 무조건 혐오했습니다.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고 하나님이라는 개념 자체를 증오했죠.”


결국 재정상황이 악화된 살렙은 에스코트까지 하게 됐고, 집세를 내지 못해 살던 곳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약물중독은) 그리 드문 케이스가 아닙니다. 도움의 손길을 찾거나 다른 LGBTQ들에게 다가가려다 결국 약물에 손을 대는 케이스를 적잖게 보는 같아요.”


그렇게 바닥에 다다른 살렙은 어떻게든 재기하고 싶었다 2010 그는 케냐의 사원에서 성직자로 있던 사촌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3개월간 보내게 된다. 그는 사원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을 이런 처지로까지 내몬 자해행위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게 거부당한 데서 비롯됐더라구요. 자신을 받아들이려면 필요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절박감과 고독감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케냐, 탄자니아)에서 2년반을 보낸 그는 워싱턴 DC에서 성공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에겐 게이 남성으로서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신앙심이 화합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설교자가 알려준 대로 따르기보다는 자신과 종교와의 관계를 나름대로 재정립했습니다. 설교자들이 하는 말은 결국 사람들의 견해니까요.”


2013 온타리오로 돌아온 그는 어떤 교회에서도 활동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을 돕는데 종교가 제한조건으로 작용하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소명이 있었다. 


올바른 일을 하는 성직자들은 굳이 성직칼라가 없어도, 특정 교회에 속해 있지 않아도 세상을 바꿀 있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Knights) 그렇게 해서 생겨났죠.”


2016 2 토론토에서 설립된 비영리단체 중동계 퀴어들을 위해 아라비안 나이트 LGBTQ 한달에 Club 120Black Eagle 등의 회장에서 한달에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문화를 즐길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목표는 자신을 찾아가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으로, 살렙은 자신이 어릴 때도 이런 공간이 있었더라면 힘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주최하는 파티는 중동풍의 하우스 음악과 드래그쇼, 벨리댄스 , 문화를 즐기기 위한 공간으로, 술탄의 몸종오일 레슬링 같은 테마 파티도 기획하곤 하는데, 달에 열리는 이벤트에는 많으면 300 명의 인파가 몰릴 때도 있다고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 파티. 사진: Courtesy Mitchel Raphael



아라비안 나이트 LGBTQ에서는 피티를  통해 중동계 중에서도 특히 난민들을 위한 영어수업을 위한 재정지원, 법률 조언, 섹슈얼리티와 신앙심, 가정문제, 토론토 지역사회에 융화하기 위한 상담 , 다른 프로젝트를 위한 모금활동도 겸하고 있다고 한다. 밖에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는 HIV/에이즈 관련 교육 예방을 위한 자원도 제공하고 있다. 


살렙은 섹슈얼리티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하는 중동계 퀴어들도 자신의 종교 정체성과 타협점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세상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아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겠죠.”


아랍 중동권 퀴어들은 종교, 문화 심지어는 LGBT , 자신이 속한 다양한 공동체로부터 수치심과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시리아의 난민사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무슬림 국가 출신자 입국금지 조치, 이슬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테러 등등, 중동계 퀴어들이 정면으로 맞서야 우리 사회의 초조함은 너무나도 많다. 살렙은 LGBT 공동체에서도 외국인혐오와 이슬람혐오가 증가추세에 있으며, 결과 언론이 아랍인 무슬림들을 겨냥해 양산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보다 솔직하게 사는 훨씬 낫다고 강조하곤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결국 드러나게 있으니까요.”


살렙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을 모두 용서하고 가족과 화해했다고 한다. 교회 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던 가족들도 어쩔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가족과의 화해는정말 놀라운경험이었다고 한다.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살다보면 어두운 시기도 있고, 그러다가 터널 끝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두운 시기조차 나의 일부분이자, 지금의 나를 있게 요소죠. 그걸 이겨낼 여러분은 리더가 있고 롤모델이 있는 겁니다.”




-  Mike Miksche

- 옮긴이: 이승훈




Meet the man behind Toronto’s dance party for LGBT Middle Easter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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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로마 제국의 성노동과 여성 동성애, 그 자극적인 서술



루키아노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동성애에 관한 대화는 강렬하지만, 등장인물들은 해피앤딩을 맞지 못했다.



삽화: Alexander Barattin/Xtra



루키아노스 저작 'Dialogues of the Courtesans(창녀들의 대화)에는 성스러운 창녀와 사랑에 빠진 남성 클로나리온이레아이나, 그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들었소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레스보스 섬에서 부유한 여성 메길라가 마치 사내처럼 당신과 사랑을 나눈다고들 하잖소. 뭐라 해야 하나, 당신과 메길라가 그러니까 한 쌍의 남녀처럼...


레아이나가 무안해 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클로나리온은 대강 짐작하고 다음과 같이 묻는다. “ 그러시오? 얼굴이 붉어졌구먼. 그럼 소문이 진짜란 말이오?”


, 맞아요 클로나리온. 부끄러워요. 너무 이상한 일이라...


그러자 연인 클로나리온은아드라스테이아에 이름을 걸고 모든 털어놓으라 울부짖는다. “ 여자가 그대에게 요구했소? 그리고 잠자리에선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말해보시오.”


서기 2세기에 활동했던 아테네 풍자가 루키아노스는 사모사타(오늘날 터키의 삼사트) 출신으로, 당시 이곳은 로마제국의 영토였다. 인류 최초의 공상과학 픽션으로 여겨지는 진실한 이야기 신화가 등장하는 구전을 마치 실제 역사 자료인냥 풍자하고 있다. 반면창녀들의 대화 스케일은 작지만 사회적 규범에 대한 비판은 어느 작품에 뒤지지 않을만큼 유머러스하고 통렬하다. ‘창녀들의 대화 창녀들 간의 대화 창녀들이 고객, 가족, 연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은 소품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고급 매춘부로 때때로 추앙이 대상이 되기까지 했던 헤타에라의 사랑과 질투, 정치놀음을 다룬 작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충분히 더티하다. 서문에는당시 지중해 동부에 퍼져 있던 이교도 신전들은 성스러운 창녀를 두었으며, 이들을 찾는 것은 성스런 행위로 여겨졌으니, 이들 헤타이라는 그리스 사회의 다른 여성들, 특히 억눌려 사는 아내들보다 훨씬 많은 자유를 누리고 살았다 나온다. 


ALH라는 필명으로만 알려진 역자에 의해 The Lesbians(레즈비언들)이라는 제목으로 사비출판된 책은 1928 재판이 나오면서 훌륭한 작식과 함께 초판에서 삭제되었던 창녀들 관련 대목 군데 대목이 실리게 되었다. 대목에서 레아이나의 연인 클로나리온은 그녀가 어쩌다가 레스보스의 부유한 여인 메길라와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지 소상히 알려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창녀 레아이나는 데모나사라는 코린트인과 함께 나타난 메길라가 가발을 벗고는젊은 선수처럼 메끄럽게 머리 보여주었다고 한다. 


모습을 보고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메길라가 물었죠.”


레아이나, 나보다 잘생긴 청년을 적이 있소?”


저는 여기 청년이 어디 있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어이, 여자 취급하지 마시오라며, ‘ 이름은 메길로스, 데모나사는 아내요라고 하는 아니겠어요.”


흥분과 희열, 혼돈이 레아이나를 덮쳤다. 메길로스는 이야기 아킬레우스처럼 여장한 남자인 걸까? 메길라는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 마술처럼 변신한 남녀한몸이라고 밝힌다. “온전히 여자의 몸을 하고 태어났지만, 남자의 취향과 욕망을 가지고 있소.” 메길라는 레스보스에서 레즈비언이었던 것이다. 


레아이나는 여장을 했던 아킬레우 고대 그리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일화를 언급하지만, 메길라라는 캐릭터는 제우스와 가니메데스, 아폴로와 히아킨토스 등의 구전에 등장하는 젠더벤딩 여성 동성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신화는 수세기에 걸쳐 동성간의 사랑에 영향을 끼쳐 왔. 


루키아노스보다 세기 앞서 출판된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에는 이피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딸이 태어나면 짐이 것이라고 생각한 이피스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딸이 태어나면 죽여버릴 것이라고 맹세한다. 하지만 이피스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딸에게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이는데 이유는 할아버지의 이름이 성별중립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비디우스는 이피스가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이런 이름을 붙이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 


13세가 되던 이피스는 이안테와 정혼을 맺고 그때부터 남자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사람은 나이도 같았고 외관도 비슷했으며, 삶의 지식을 쌓는 있어서 같은 스승을 사사했다. 때부터 순수한 마음에 사랑이 깃들었으니, 사람이 받은 상처도 같은 것이었지만, 서로가 기대하는 바는 달랐다. 이안테는 이피스가 남자일 줄로만 알았고 그야말로 자신의 남편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면, 이피스도 그런 그녀를 사랑했지만, 결코 자신의 것으로 만들 없을 거라 생각했고, 그럴수록 소녀에 대한 소녀의 열정은 더욱더 깊어만 갔다.”


이피스는 자신의이상하고도 기괴한 사랑 결코 실현될 없을 거라 생각하며 절망에 빠졌지만, 이집트 여신 이시스의 힘으로 변신을 거치며 소년으로 거듭난다. 


이피스의 경우 결국 이성애를 통해 구원되는 반면, 루키아노스의 우화는 도착과 성적흥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작품 속에는 관음증적인 요소도 있지만,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성간의 이끌림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로마시대의 여성 동성애에 대한 루키아노스의 이해를 엿볼 있다. 


역자 서문에도로마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관중들에게 있어 그리스의 헤타이라들이 나눈 짧은 대화는 전혀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와 있다. 작품 속에서 관중의 역을 맡는 클로나리온이 레아이나의 레즈비언 행각을 너무나도 궁금해 하자 레아이나는 말을 이어간다:


“메길라는 제발 가지게 달라고 애원했어요. 게다가 제게 휘황찬란한 목걸이와 최상급 리넨으로 만든 튜닉을 선물해 줬답니다. 그래서 마치 남자를 안듯 그녀를 품안에 안았지요. 그러자 그녀는 온몸에 키스를 퍼부으며 본인이 말 대로 가졌어요. 엄청난 황홀감과 욕정에 사로잡혀 숨을 헐떡거리며 말이죠.”


클로나리온은 너무나도 궁금해 하며그런데 그걸 어떻게 했단 말이오? 레이아나! 부분만은 말해줘야 하오!”라며 다그쳤다. 


바로 다음이 중요한 대목인데, 신전의 창녀 레아이나는 레스보스 출신의 레즈비언이 자신을 어떻게 유혹했는지 세세하게 설명해 놓고는 갑자기 수줍은 척을 한다. “제발 수치스러운 부분은 너무 자세하게 묻지는 말아요. 하늘의 여왕에 이름을 걸고 그것만은 절대로 절대로 말해줄 없어요!”


루키아노스의 ‘The Lesbian’ 이성애자 남성 독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가지 흥미로운 점은 로마제국의 전성기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 동성애를 다룬 작품 중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스토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레아이나도 결국 메길라의 구애를 무시하며 남자의 품을 선택하는데, 아무도 결정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지난 수천년 동안 몇몇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필자는 얼마전 상영된 2015년도 영화 캐롤 떠올리지 않을 없다. 각본을 맡았던 필리스 나지 파트리시아 하이스미스 원작소설이사상 최초의  해피엔딩 레즈비언 스토리라고 평했었다. 해피엔딩 레즈비언 스토리를 접하기까지 2천년이란 세월이 넘게 걸린 것이다. 




- Michael Lyons

- 옮긴이: 이승훈




The titillating narrative of sex work and lesbianism in the Rom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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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6




아랍계 퀴어남성인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이게 됐다.




동안 SNS에서 섹슈얼리티를 밝히지 않은 나, 더이상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사진: Christian Horz/iStock/Thinkstock



엄마가 페이스북 게시글에좋아요 누른 보니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몇달전 런던 프라이드 게이 이프타르가 제공되었다는 기사를 올렸었다. 이프타르란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 단식을 끝내고 드는 식사를 말한다. 나는 17 이후로 단식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기사였다.


삶에서 이슬람과 동성애는 결코 함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말이다. 불가지론자, 아니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그래도 이런 기사를 보면 정체성 사이의 틈이 매워지는 같다. 그런데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2007 처음 페이스북에 가입했을 때부터 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 친구로 등록되어 있다. 언제 누가 누구한테 친구신청을 보냈는지 일일이 기억나지도 않을 뿐더러,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처음엔 말이다. 


중동계 대가족은 말이 많다. 레바논 사람들 중엔 남얘기 하는 유일한 낙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집처럼 친척이 많으면 그만큼 소문도 멀리 퍼진다. 나는 18 때부터 섹슈얼리티 때문에 수많은 소문의 표적이 되었다.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것도 그렇고, 나보다 나이가 배나 많은 사람과 사귄 것도 그랬다. 그런데 페이스북에서까지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면 말이 많아질 같았다. 


그래서 SNS에서는 굳이  섹슈얼리티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종교와 섹슈얼리티가 연관된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더 조심하게 됐다. 그러면서 프라이버시를 중시여긴다는 변명하에 이런 나를 정당화시켰다.


프라이드 관련 기사는 올렸지만, ‘게이 프라이드라고 하지 않는 이상 친척들은 그게 뭔지 몰랐다. 사진도 일반적인 것만 올렸는데, 친척들은 디스코볼이나 비어가든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만 보고는 그곳이 퀴어 공간이라는 없었다. 물론 무지개 깃발 사진은 피했다.


아무리 커밍아웃을 하려 해도 커밍아웃이 완전하지 않을 신경에 정말 거슬리곤 한다. 나는 아끼는 사람들(친한 가족들)한테는 커밍아웃했지만, 페이스북에서는 18 때처럼 자신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한채 벽장 속에 숨어 있었다. 


2015 프라이드 시즌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에 무지개 필터가 씌워져 있는 봤다. 나는 프로필 사진을 그대로 두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게이라는 사실에 떳떳하다고 생각했는데, 필터 하나 쓰는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부정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한 때가 처음이었다. 지금처럼 페이스북에서 계속 자신을 숨기는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말 나도 프로필 사진에 무지개 필터를 추가했다. 


조그만 행동은 내가 섹슈얼리티와 관련해 SNS에서 취한 가장 공공연한 선언이 되었고, 엄마와 성건강이나 다른 LGBT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게 계기가 되었. 그건 내가 절실히 바라던 해방감이었다. 나는 이반 관련 기사와 함께 의견도 올리기 시작했고, 퀴어나 다른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이슈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일부 친척들은 차단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이프타르 기사에 엄마가 좋아요를 누르자, 형들도, 사촌도 그리고 형수까지 좋아요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픈된 공간에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준다는 개인적으로 혁명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가족들의 지지는 내가 속한 문화와 섹슈얼리티 사이에서 느끼던 간격을 좁혀주기도 했다.


지난주 CNN 베이루트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프라이드 행사 관해 보도했다. 우리 가족은 레바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프타르 기사보다 훨씬 친근감을 느끼는 소식이었다. 나는 기사도 공유했다. 이번엔 엄마는 물론 누나도 좋아요를 누르며 이런 댓글까지 달아줬다. 


대박!!!!! 이젠 프라이드할 때도 됐지!”




- Mike Miksche

- 옮긴이: 이승훈




How Facebook helped me reconcile my sexuality as a queer Arab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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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캐나다, 드디어 트랜스젠더 인권법안 가결 




법안 C-16호는 캐나다 인권법으로 성별정체성과 성별표현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다. 




2017년 5월 13일 토론토 시청 앞에 게양된 무지개 깃발과 트랜스젠더 깃발. 사진: Nick Lachance/Daily Xtra



다년간에 걸친 노력끝에 트랜스젠더 인권이 드디어 캐나다 법에 명시된다. 


성별 정체성과 성별 표현을 캐나다 인권법으로 보호하고, 증오범죄 조항에도 포함시키는 C-16호가 상하원을 통과했다. 


2017 6 15 법안은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딛혔지만,  67 11 상원을 통과했다.


하퍼 정권 때도 트랜스젠더 인권법안이 하원을 가결되었지만 상원에서 좌절된 있다. 


법안 C-16호가 시행되면 트랜스젠더들은 캐나다 전역에서 법적 보호를 받을 있게 된다. 한편 2017 6 13일에는 유콘주도 지방정부로는 마지막으로 트랜스젠더 인권법을 가결시켰다.


상원에서는 법안 C-16호를 두고 격한 논쟁 오갔으며, 일부 보수당 의원들이 법안의 보장 내용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다.


수차례 개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원본 그대로 상원을 통과했으며, 이달말 여왕의 재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 Arshy Mann

- 옮긴이: 이승훈



Canada has finally passed a trans-rights b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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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애는 성적지향일까?

세계공통 2017.06.13 11:08 Posted by mitr

2016-11-29




무성애는 성적지향일까?




섹스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무성애자들 중에도 키스와 애무는 즐기는 경우는 많다. 문제는 섹스라고 한다. 삽화: V Giridhar/Daily Xtra



수상경력에 빛나는 드루팔 코드 제작자이자, 18,000명의 트위터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으며, 여성으로는 최초로 Linux Journal 표지를 장식했던 앤지 바이런은 번이나 커밍아웃을 해야 했다고 한다. 


처음엔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했는데, 흔한 상황이었다. 다섯 다른 여자 아이의 치마 안을 들여다 보려다 들킨 것이다. 1990년대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바이런은 뒤로도 일을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스무살이 바이런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만난 퀴어펑크 가수와 사랑에 빠진. 첫만남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노바스코샤까지 갔고, 곧바로 짐을 챙겨 캐나다로 이사해 버렸다. 누가 봐도 레즈비언다운 행동이었다. 그 후로  사람은 17년을 함께 살았다. 


사람의 생활은 언뜻 보기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바이런은 아내에게 꽃을 선물해 주고, 눈을 바라보는 좋았다. 물론 키스와 애무도 했고 손도 잡았다. 그렇게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어갔다. 문제는 섹스였다.


20 동안 바이런은 아내의 성욕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도저히 무리였다고 한다. 30대가 되면 찾아온다는 성욕의 절정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없었다. 오르가즘을 느낄 때까지 노력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혼한지 , 존재론적 의구심과 혼란 속에서 구글 검색을 하던 무성애라는 용어를 접하게 됐고,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내한테 관심이 없었던 아니에요. 그냥 못느꼈을 뿐이죠. 그땐 이런 뭐라 부르는지도 몰랐어요. 정말 혼란스러웠죠.” 


바이런은 37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성적지향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엔 자신이 레즈비언인 알았다. 그런 그녀는 작년에 다시 커밍아웃했다. 이번엔동성성애적 무성애자(homo-erotic asexual) 말이다. (본인은 레즈비언적 에이스(lesbionic ace)라는 표현을 선호한다고 한다.)


바이런은 여자를 좋아한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옷을 벗어던지고 나뒹굴기보다는 근사한 촛불과 함께 저녁식사를 즐기는 편이 좋다고 한다. 물론 레즈비언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필자는 바이런이 자신에게 성적지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기 위해 직접 전화를 걸었다. 바이런은 자신에게도 성적지향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자신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자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섹스는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자도 좋고 로맨스도 좋지만, 아내의 리비도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면? 삽화: V Giridhar/Daily Xtra


 

지난 한해 동안 무성애자 공동체는 자신들도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들과 똑같이 인정받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런가 하면 세계 각지의 연구자 20 명이 영국 통계청의 2021년도 인구조사에 성적지향 항목을 추가해 달라는 내용의 공개서한에 서명했다.


인구조사에 성적지향 항목이 포함되면, 영국 인구의 1% , 50만여 명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좌시되어온 성소수자들의 가시성과 정당성 제고에도 도움이  거라는 것이다. 


이들 학자 중에서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교에 재직중인 심리학자 로리 브로토와 모랙 율은 작년 여름 <성적 행동 문헌(Archives of Sexual Behaviour)> 발표한 논문 통해 무성애와 관련된 증거물을 검토하며, 무성애 또한 성적지향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성애를 성적지향으로 분류하려는 움직임은 무성애가 아닌 것들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커밍아웃한 에이스(ace: 무성애자를 뜻하는 공동체 내의 용어)들은 하나같이 호르몬 문제일 거라느니,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렇다느니, 성을 억압해서 그렇다느니, 그것도 아니면 제대로 남근을 만나봐서 그렇다는 식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바이런은 라마와 섹스해 보지도 않고 라마가 싫은지 어떻게 아냐는 식의 이런 주장을 무성애자들은 접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한다. 


브로토와 율은 논문에서 무성애에 해당되지 않는 것을 체계적으로 삭제해가는 방식을 취한다.



성적지향처럼 기능하고 드러나기도 성적지향처럼 드러난다면 성적지향으로 봐야 것이다.”



먼저, 무성애는 정신장애일까? 무성애자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압력만으론 설명할 없는 수준의 정신질환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무성애자들은 자폐 스펙트럼을 겪을 활율이 높지만, 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은 없으며, 자폐 스펙트럼을 겪는 사람들도 정신질환의 낙인을 지우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럼 무성애는 성적 기능장애일까? 무성애자 여성을 대상으로 일련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성욕을 가진 여성들과 성적 흥분 기능에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한다. , 단지 섹스를 하고 싶지 않을 뿐인 것이. 성욕저하 장애를 앓는 이들과는 달리 무성애자들은 (바이런처럼) 자신이 무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면 굳이 힘들어하지 않는다. 


성적 기능장애란 대부분 일시적인 것으로, 트라우마와 같은 정신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반면, 무성애는 평생 지속되며, 바뀌지도 않는다. 


그럼 이상성욕 , 성욕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경우는 어떨까? , 일종의 () 대한 페티쉬가 있거나, 너무 추상적인 것에 집중한 나머지, 그걸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아닐까?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만, 무성애자가 특정한 성적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이 브로토와 율 견해이다. 


브로토와 율은 어떻게 해서 무성애자가 되든 그 상황 자체는 이성애자나 동성애자, 양성애자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무성애자들도 동성애자들처럼 위로 남자형제가  많다거나, 왼손잡이일 확율이 높는 , 자궁내 발달적 영향에 의한 생물지표가 있다. 무성애는 성적지향처럼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지속되며 평생 동안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또한 여느 성적지향처럼 무성애자들도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섹스(, 경우에서는 섹스를 하지 않는 ) 추구한다. 


성적지향처럼 기능하고 드러나기도 성적지향처럼 드러난다면 성적지향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로도 무성애는 병이 아니며 고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만, 여기서 몇가지 까다로운 문제점이 제기된다. 성적지향이란 우리에게 누구와 섹스하라고 알려주는 일종의 내면적인 메카니즘으로 정의할 있다. 무성애자가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면, 성적지향이 아예 없다는 아닐까?


브로토는그건 모르겠다 한다. “ 정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같습니다. 지향이란 여러 방향 중에서 어느쪽이든 가리키 나침반이고 그것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그 지향을 분류한다고 해도, 침이 어느쪽도 가리킨다고 해서 돌아가지 않는다고 없으니까요.”


브로토는 사실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성적지향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적한다.



한가지 중요한 점은 지향을 가짐으로써 초래되는 정치적 영향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만약 과학자들이 지향이 어디서 비롯되고, 어떻게 작용하며, 바뀌는지,  그것이 유의미한 분류법이긴 건지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면, 객관적인 척도를 이끌어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브로토는무성애가 성적지향이라는 증거가 그렇지 않다는 증거보다 많다고 본다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부분이 많다 덧붙였다.


한편 저스틴 뮤니크는한가지 중요한 점은 지향을 가짐으로써 초래되는 정치적 영향이 무엇이냐는 이라고 한다. 스위스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ERN)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캐나다 출신의 핵물리학자 뮤니크는 낭만적 무성애자이다. 


뮤니크는 캐나다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의 인권법을 언급하며, 성적지향은 차별 금지의 근거가 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무성애자들도 법의 보호를 받으려면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성애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비추어질 때가 많지만, 사실은 내부에서도 많은 논쟁이 오간다고 한다. 자신을 퀴어로 간주하는 무성애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연애관계에 있는 경우엔 무성애자도 파트너를 위해서라면 섹스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려 반면, 섹스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이들은 무성애자는 섹스를 아예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필하려 한.


뮤니크는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한 이라고 한다.



로리 브로토는 지향이란 것이 여러 방향 중에 어느쪽을 가리키거나, 아예 아무쪽도 가리키지 않을 수도 있는 나침판과 같다고 한다. 사진: Lori Brotto



연구가들의 의견도 각양각색이다.


브로크 대학교에서 다년간 무성애를 연구해온 베테랑 연구가 앤서니 보거트는 무성애를 이해하는 단서를 가지 제시했는데, 무성애자도 성욕이 있지만,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듯 정체성이 없는 섹슈얼리티를 ‘autuchorissexualism’[각주:1]이라 부른다. 


브로토와 율의 연구를 보아도 대부분의 무성애자가 가끔은 자위를 하며, 허구상의 캐릭터나 성적이지 않은 장면에 대해 성적 환상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무성애는 브로토의 말대로 침은 있지만 특정 방향은 가리키지 않는 나침판과도 같다고 있는 것이다. 



성적지향은 아주 확실합니다. , 누구에게도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거죠.”



한편 캔사스 대학의 심리학자 마이클 스톰스는 무성애를 이해하는 또다른 방법을 제시한 있는데, 1979 스톰스는 성적지향은 방향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섹슈얼리티는 1차원적 킨제이척도가 아니라 2차원적 평면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후로 수많은 무성애자들이 이러한 연속성 학설을 받아들여 그레이에이(대체로 무성애자인 경우), 데미섹슈얼(감정적인 연인관계 속에서만 성적인 경우), 낭만적 무성애(바이런처럼 로맨스는 느끼지만 성적 매력은 느끼지 않는 경우) 같은 다양한 용어를 만들어냈다. 


만약 스톰스의 모델이 유효하다면, 무성애는 성적지향이라기보다는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의 문제에 가깝다고 있을 것이다.

 

무성애 가시성 교육 네트워크(Asexuality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성애자 인권가 마이클 도레는 무성애를 성적지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생각에 지향이라는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상대를 뜻한다고 보거든요. 성적지향은 아주 확실합니다. , 누구에게도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거죠.”


그는 무성애도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선택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무성애자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은 무조건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물러나야 했던 경험이라고 도레는 말한다. 무성애자들은 동성애자처럼 성적 연대감을 맺진 못하지만, 그들과 똑같이 배타, 차별, 정신적 압박과 같은 시련을 겪는다는 것이다.


바이런은이런 자신이 괴짜가 아니라는 깨달은 나에겐 정말 큰 경험이었다 한다. 인터넷을 통해 무성애의 세계를 접한 마치 세상에 레즈비언이 하나만 있는 아니라는  깨달은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도레나 바이런에게 있어 무성애를 성적지향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사회에서 무성애도 성적지향으로 대우받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무성애를 동성애나 이성애, 양성애처럼 정상적이고, 근본적이며, 바꿀 없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로 본다면, 본인에게 맞지 않는 다른 것을 추구하느라 세월을 허비하는 경우도 줄어들 거라는 것이다.


무성애가 정말 성적지향인지, 아니면 성욕 스펙트럼의 가장 맨끝자락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별로 상관없는 현상을 억지로 지붕 아래에 묶어둔 것인지, 우리는 이제 겨우 베일을 조금씩 벗겨가고 있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교의 브로토는 앞으로도 연구를 이어갈 것이라고 한다.




- Niko Bell

- 옮긴이: 이승훈




Is asexuality a sexual orie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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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非)정체성 섹슈얼리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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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9




흑인 논바이너리라는 이름의 정치반란





흑인 사회에는 젠더불순응이 자리가 거의 없지만, 내겐 구명줄과도 같다.





사진: belle ancell



나는 흑인이자 논바이너리다. 한편으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지만, 다른 한편으론 정체성의 이런 조각들에 대해 이해하고 내세우게 최근에 이르러서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보통분법으로 나뉜다. 흑인 아니면 백인, 동성애자 아니면 이성애자, 남자 아니면 여자 등등. 그리고 우린 대부분 자신과 그다지 상관이 없거나 심지어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 해도 이런 분류 속에서 대인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오직 가지 선택만 주어지는 이런 분류는 혼혈이자 논바이너리 퀴어인 내가 공간을 주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혼혈이라는 사실 때문에 갈등하며 보냈다. 백인들과 어울리기엔 너무 검었고, 흑인들과 어울리기엔 검었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에게 있어 인종문제는 끝없는 갈등거리지만, 나는 나름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납득하고 수용하게 되었다.


반면 나의 성별 정체성은 아직도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린 태어날 누구나 성별을 지정받는다. 그리고 순간부터 우린 성별에 따라 받아들여진다. 물론 시스젠더[각주:1]들에겐  문제가 없다. 본인의 성별 정체성이 지정 받은 성별과 일치한다는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니까 말이다. 하지만 밖의 사람들에겐 보건, 교육, 대인관계 등등 일련의 불타는 링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나마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성별중립적인 양육을 옹호해 오던 분이라 행복한 편이었다. 엄마가 이런 표현에 동의할진 모르겠지만, 사회가 여자아이에게 거는 기대에 끼워맞추지 않는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만은 알고 계셨다.  엄마는 바비인형보다는 액션피겨를, 핑크 드레스보다는 츄리닝 바지를 좋아하는 성향을 부추겨 주셨다. 하지만 그렇듯 중학교 생활은 말도 되는 가부장주의로 꿀꺽 삼켜버렸고, 나는 12 때부터 마스카라를 하고 다리털을 밀기 시작했다. 내가 다녔던 지루한 영국 중학교는 여학생들한테 치마를 강요하면서도 다리를 어디까지만 드러내야 하는지, 구두는 닦고 다니는지, 남학생들의 주의를 끌지 않는 색깔의 브래지어를 차고 다니는지 일일이 검사하는 곳이었다. 


혼혈아로 자란다는 건 복잡한 경험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는 대부분을 백인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나도 엄마처럼 혼혈(자메이카, 감비아, 백인 혼혈이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 나의 흑인 핏줄엔 크게 공감하지 않고 자랐다. 어릴 엄마한테 나도 백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 나더러 샤워할 얼굴에 진흙도 같이 씻어내라 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뚜렷한 인종차별적 발언 때문에 나는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세상은 나를 흑인계라고 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6살이 되어 국제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백인성에 둘러싸여 살아온 나는 피부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는데, 화학제품으로 스트레이트 퍼머를 한다거나, ‘표준 영국영어 구사한다거나, 오로지영국인이라는 정체성만 가지고 산다거나, 심지어는 조별토론회 이민자 수용에 반대하는 한다는 식이었다. 때는 몰랐지만 자신을 이런 식으로 표백하는 자존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다른 흑인이나 유색인종을 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흑인들과 어울리며, 흑인 작가들의 글을 읽고, 흑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흡수하며 이런 부분도 차차 바뀌어갔다. 하지만 복잡한 정체성 외에도 나는 내게 있어 성별과 퀴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나는 논바이너리로서 살아온 삶을 정치적 반란이라고 표현한다. (누구나 그런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이분법적 성별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흑인 사회에서는 젠더불순응이 자리가 별로 없다. 그건 흑인의 몸에 젠더화 또는 탈젠더화된 가능성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흑인성을 인지하는 방법 때문이라 있다. 이는 젠더를 스펙트럼이나 무수한 가능성으로 보기보다는 엄격한 이분법(남자 아니면 여자) 보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역사를 통틀어 흑인의 몸은 백인우월주의를 거들기 위해 끊임없이 성별로 분류되어 왔다. 예를 들어보자. 식민주의와 노예제도를 통해 흑인여성의 몸은 정복당해 왔고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노예제도 하에서 흑인은소유물이었기 때문에 인권같은 없었다. 따라서 흑인여성은 아무리 성폭행 당해도 신고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대 때는 흑인여성의 강간과 지배가 침략과 식민지화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아프리카 여성은 물론 거북이섬[각주:2] 여성들까지 성추행은 학살의 도구로 쓰였다. 이들 여성의 용도는 육체노동 밖에 없었다. 흑인 사회를 성별로 분리시키는 것은 식민주의, 노예제도, 인종분리 정책 백인우월주의 프로젝트의성공 없어서는 안될 메카니즘이었던 것이다. 


젠더화된 ()흑인성은 역사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코이코이족 출신이었던 사라 바트만 1700년대 백인들의 구경꺼리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백인들은 사라의 몸을 구경했다. 그녀의 엉덩이와 몸매는 너무 풍만해서 마르고 창백한 백인들의 미적기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한편 2016년에는 패트리스 브라운 사진이 화제를 모았다. 4학년을 가르치는 교사 치고는 복장이 너무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사람들이 지적하고 싶었던 그녀의 각선미였다. 사람들이 하려고 했던 말은 브라운의 ( 흑인 여성의 )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300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똑같은 시선의 희생자가 되었다. 여성 모두 체형 때문에 과도하게 성애화되면서도 성적 주체성은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흑인에게 부과된 이러한 엄격한 성별역할은 해로운 선입관과 인식을 동반하게 되는데, 내가 이분법적인 성별을 거부하게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엇다. 실제로 이분법적인 성별은 여성과 여성성을 억압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흑인여성들을 극단화된 성차별이라고 하는 역설 속에 영원히 가둬놓기 위한 것이라 있다. 나는 앞으로도 흑인 여성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겠지만, 정체성은 논바이너리이다. 


패트리스 브라운 때처럼 사람들은 몸과 화장, 스타일을 보자마자 추측과 판단의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이러한 서사에서 결코 벗어날 없겠지만, 흑인여성에 대한 잣대를 거부함으로서 내부의 평화와 강인함을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애쉴리 섀클포드가 논바이너리 펨에 관한 유명한 에서 말이 있다. 검고 뚱뚱한 몸을 가진 탓에 연상의 남자들은 그녀를 과도하게 성애화해도 된다고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흑인 여성성은 시끄럽고 강인하고 용감하며 공격적이라는 이유로 남성화되는 경우가 많다. 섀클포드는 이러한 경험 때문에 자신의 성별은 결코중성화 없을 거라고 하지만 (여성호칭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여기는 이유는이분법적 성별을 이행하는 데서 오는 엇갈린 신호와 절박함을 더이상 소화해낼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섀클포드는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젠더는 여정을 거쳐왔고,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있으며, 저항의 세계를 품고 있다. 상대방이 성별을 짐작하기 전에 입으로 성별을 밝히는 행동 하나하나가 공동체의 역량인 것이다.“


섀클포드의 말은 줄곧 내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섀클포드의 글을 읽으며 빼빼 마르고 중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백인과는 다른 논바이너리의 경험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백인성 안에서 짜여진 것과는 다른, 논바이너리에 대한 나만의 이해를 구축할 있었다. 


사람들은 성별에 대한 구식 관점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바이너리들의 목소리도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분법적 성별을 해체하는 것이 그러한 분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득이 되는 아니다. 이분법적 성별은 우리 모두, 특히 여성을 제한적이고 폭력적인 기준에 옭매기 위해 구축된 사회적 틀이라는 점에서 누구나 이러한 이분법에 맞설 있고 맞서야만 한다. 


성별 이분법( 해체) 흑인의 몸을 ()식민지화하는 있어서 근본적인 부분이다. 흑인 남자 아이들도 있고 나약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흑인 남자 또한 과도한 범죄화와 포식성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흑인 남자아이도 낙인이나 동성애혐오 없이 여성스러울 있어야 하며, 흑인 여성 또한 무책임하거나래칫[각주:3]이라는 선입관 없이 편모가정을 꾸릴 있어야 한다. 흑인 여성도 이중잣대 하에 비난받는 없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논바이너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는 다양하고 복잡한 경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흑인 논바이너리들은 자기 비식민화를 거칠 때에만 정체성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있다. 사회는 기존과는 다른 흑인, 꺼벙하거나, 요상하거나, 퀴어하거나, 밖에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해진 편협한 선입관에서 벗어난 흑인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흑인에게 가해지는 편협한 성별 역할은 노예제도와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흑인 사회는 이러한 것들을 자기것으로 내면화시키기도 한다. 흑인 퀴어나 다원적 성별을 가진 이들이 다른 공동체를 이루거나 찾아나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내게 있어 Black Lives Matter 운동은 무조건적인 수용과 흑인 몸에 대한 긍정의 공간이다. Black Lives Matter 흑인 퀴어와 트랜스젠더 들에게 있어 사정없이 힘과 용기를 얻는 운동이라 있다. 웹사이트에는 운동의 최우선사항으로트랜스젠더 긍정퀴어 긍정 언급되어 있다. 나는 흑인 논바이너리로서 Black Lives Matter 밴쿠버 활동을 조직하며 정말 뿌듯한 경험을 있었다. 다른 시민권 운동과는 달리 여성, , 퀴어, 트랜스젠더 흑인들이 전면에 나설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흑인해방운동을 수용적이고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려면 성별 반란이 포함되어야 한다. 나는 정치의식의 살아있는 결정체다. 




- Cicely-Belle Blain

- 옮긴이: 이승훈




The political rebellion of being black and non-b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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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isgender: 시스젠더란 트랜스젠더에 대응하는 용어로, 신체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시스 남자라고 하면 신체구조도 남자고 본인의 성별 정체성도 남자인 경우. [본문으로]
  2. Turtle Island: 북미대륙. 일부 북미 원주민들의 용어로, 원주민 인권 활동가들은 지금도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3. ratchet: ‘저속한 빈민 흑인여성’ 또는 그런 언행, 문화를 가리키는 속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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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5




크로스 드레서 레즈비언 난봉꾼이 바하마 섬을 통치하게 사연




인형을 데리고 다니며 수많은 여자와 염문을 뿌린 골계가 카스테어스를 소개한다. 




당당한 레즈비언이자 즉석해적, 기업가 겸 바람둥이 섬소유자였던 조 카스테어스. 삽화: Alexander Barattin/Daily Xtra



바하마 제도는 해적의 역사 간직한 곳이지만 1940년대 미국인 관광객을 가들 실은 배가 들어올 때만 해도 700개가 넘는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승객들이 웨일 케이에 도착했을 , 섬을 장악하고 있던 레즈비언 영주 카스테어스(Joe Carstairs) 이들을 연행해 버렸다.


사람들 앞에 나타난 카스테어스는 섬의 여신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카스테어스와 칼을 심복들은 영역 침범자들을 포박하고 밤새 겁을 주었다. 


여행객들은 이튿날 아침 풀려났는데, 아마 다들 동요와 혼란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반면  골탕먹이는 좋아했던 카스테어스는 다음 파티 자랑할 무용담을 얻게 되었다. 


저널리스트 케이트 서머스케일이 기묘한 모험꾼 매리언 카스테어스를 처음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기사를 때였다. 1900 영국 런던에 태어난 카스테어스는 1993 타계했다. 당시 서머스케일은 카스테어스의 부고를 맡게 되었는데, 거기서 걸음 나아가 1997년에 전기집 The Queen of Whale Cay(웨일 케이의 여왕) 내게 된다. 


카스테어스는 명실공히 작은 섬의 통치자가 되기 전인 1920년대 세계적인 모터보트 레이서로 이름을 날렸었다. 1 세계대전 구급차를 운전하며 스피드감을 익히게 카스테어스는 종전과 함께 관심거리를 찾게 됐는데 그게 바로 모터보트 레이싱이었다. 모터보트 레이싱은 고가의 신식 스포츠였지만, 미국 석유회사의 상속녀로 태어난 카스테어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으로서 보트를 몬다는 굉장히 튀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정말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이시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던 카스테어스는 남자옷을 입고, 시가를 폈으며,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그리고 근육질의 팔엔 문신을 새겼고, ‘라는 이름을 선호했다고 한다. (서머스케일은 카스테어스가 트랜스젠더 남성이었을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도 시스젠더[각주:1] 여성으로 대하기로 하겠다.)


당시 세상은 카스테어스 같은 사람들의 외모나 언행은 물론 그들이 대형 스포츠 시합에 참가하는 것도 받아들였었다. 1 세계대전 동안 여자들은 남자들이 하던 일을 도맡게 되었고, 결과 종전 직후에도 사회는 보이시한 여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1930년대부터 언론은 카스테어스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서머스케일에 따르면, 신문사들은 담배를 피거나, 침을 밷거나, 검을 씹고, 문신은 새기는 , 카스테어스의 남성스런 성격을 조롱했고, 카스테어스는 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가 겹쳐 영국을 영원히 떠나기로 한다. 


카스테어스가 웨일 케이 사들인 1934년이었다. 길이 14 킬로미터, 너비 6 킬로미터의 섬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150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1930년대만 해도 150 킬로미터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고, 덕분에 카스테어스는 섬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던 바하마 제도는 당시 브리시티 웨스트 인디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당시 영국법에 따르면 카스테어스는 섬의 판사이자 배심원이었다. 카스테어스는 섬의 깃발까지 도안하기에 이르렀는데,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태양이 들어간 문양이었다.


카스테어스는 사람을 고용해 도로, 상점, 라디오국, 학교, 발전소, 박물관 도서관, 항구(대여섯 척의 배를 이곳에 정박시켜 두었다), 저택 등의 시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1936년에 완공된 저택은 스페인풍 빌라였는데, 침실과 화장실이 각각 다섯 개씩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과 미국에서 지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여자가 끊기는 원치 않았던 카스테어스 자신도 뉴욕, 마이애미, 유럽을 드나들며 여자를 물색해 데려오곤 했다. 손님이 오면 영화, 포커게임, 복싱경기, 사냥, 근처 유람(카스테어스는 웨일 케이 외에도 섬을 여러 소유하고 있었다) 데리고 다녔고 그리고 가끔은 나체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런 카스테어스 곁을 가장 오래 지킨 친구는 바로 토드 워들리 경이라는 이름의 남자인형이었다. 인형은 1925 스위스 알프스에 갔을 첫사랑 루스 볼드윈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카스테어스는 평생 인형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카스테어스는 늠름한 인형을 위해 소형 정장을 제작해 입히기도 했고, 런던 자택에는매리언 바바라 카스테어스와 토드 워들리 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었다.


카스테어스의 첫사랑으로 그녀에게 워들리를 선물했던 볼드윈은 1937 세상을 떠난다. 카스테어스는 그런 그녀를 기리기 위해 섬에 캐서린 교회를 세워, (캐서린은 볼드윈의 이름이었다.) 성직자를 앉혔다. 카스테어스의 말을 빌자면 줄리언 헨쇼라는 목사정말 정말 정말 게이틱했는데, 파티 사람들에게 자신의 알몸을 곧잘 보였다고 한다. 


카스테어스는 평생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는데, 그녀가 정복한 여성 중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질녀였던 돌리 와일드 있었다. 사람은 1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만났다고 한다. 밖에 독일 출신의 유명 배우 가수 마를렌 디트리히와도 1937 프랑스에서 만났는데, 마를렌은 카스테어스를해적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카스테어스는 여자를 꼬시거나, 손님들을 기쁘게 하지 않을 때는 원대한 꿈을 좇아 다녔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운송사업을 했던 적도 있고, 실패로 돌아갔지만 마이애미 근처에 개인 공항을 지으려 적도 있었다. 현지민들을 돕는 일에도 열성이었는데, 대부분은 가난한 노예의 후손들이었다. (물론 좋은 일도 했지만, 식민지배자를 자처한 그녀의 태도는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


섬에 있을 때는 호주머니에 칼을 넣고 다녔고, (누드 사진을 찍을 때면 칼을 입에 물곤 했다.) 손님, 이웃, 아무 생각이 없는 미국인 관광객 없이 기회만 되면 상대방을 골탕먹이곤 했다. 


그런 그녀가 웨일 케이의 왕국을 매각한 1975년이었다. 플로리다에 정착한 카스테어스는 집을 다양한 소품과 여자친구들의 사진(120장이나 된다)으로 빼곡히 채웠다. 나이가 후에도 카스테어스의 성격은 여전했다. 백내장 수술을 받았을 때는 신이 나서 해적처럼 애꾸눈 안대를 차고 다녔고, “워들리 만큼왜소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즐기기도 했다. 93세의 나이로 길고도 해프닝 많은 삶을 마감한 카스테어스는 워들리와 함게 화장되었다.  




- Jeremy Willard

- 옮긴이: 이승훈




How a cross-dressing lesbian playboy ruled a Bahamian kingdom

Click here for the original article on Daily Xtra.

  1. Cisgender: 시스젠더란 트랜스젠더에 대응하는 용어로, 신체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시스 남자라고 하면 신체구조도 남자고 본인의 성별 정체성도 남자인 경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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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장애인 기혼남 고객을 만나며 느낀 것들 (하)




사람의 관계를 보며 나는 사랑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삽화: Indiana Joel/Daily Xtra



(전편)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는 몸을 잡았고, 나는 그의 몸에 반즈음 올라타서 위에서 지긋이 눌렸다. 그렇게 키스를 나누며 애무를 하는 동안 단단해진 거시기가 그의 몸을 찔러댔. 나는 그의 사타구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거시기는 물렁했다. 


때도 있고 때도 있어서..”


괜찮아요. 해야 하는 아니니까.”


그는 살짝 밀치더니 몸을 구부려서 거기를 빨기 시작했다. 가누는 걸 힘들어 해서 거시기를 가능한 그의 얼굴쪽에 가깝게 대줬다. 다행히도 침대가 커서 내 머리가 침대 밖으로 삐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놀랄 정도로 테크닉이 좋았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빨리 사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빨리 오르가즘으로 이끌어줬고, 나는 그만 입에 싸버렸다.


이렇게 빨리 사정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다시 발기한다 해도 최소한 30분은 걸리기 때문에 섹스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렇게 빨리 사정해 버렸는데도 그는 전혀 실망한 기색 없이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 누워 있었다. 잠시 나는 그의 얼굴을 들어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그를 팔에 눕히고 있자니 궁금해지는 많아졌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난감했다. 보통 오르가즘을 경험하고 나면 자기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게 되는데, 이번엔 나만 사정을 터라 상황이 좀 달랐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남편분힘드시겠어요.”


그렇죠. 전에는 밖에도 나가고 여행도 가고 했죠. 요즘도 나가긴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아서 예전만큼 자주는 나가요.”


그럼…” 나는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친밀한 시간도 가지고 그러세요?”


그는 웃었다.